I. 머리말
II. 소조상의 분류와 제작기법
III. 소조상의 분석
1. 소조상의 원형 추론
2. 소조상의 제작시기
IV. 구아리 유적의 성격
V. 맺음말
요약
부여 구아리 유적은 舊衙里寺址, 舊衙里遺蹟, 舊衙里 우물지 등으로 불리는 등 그 성격이 명확하지 않았다. 본고는 1942년과 1943년도에 藤澤一夫가 발굴 조사한 구아리 출토 소조상편을 소개・검토하면서 이것이 원래 목탑의 塔內塑像이었음을 밝혔다. 또 1992년에 발굴 조사한 구아리 우물지와 초기 대형수로의 검토를 통해 당시의 조사지역이 "舊衙里寺址"의 외곽에 해당하고 그 동북쪽에 藤澤一夫가 발굴한 舊衙里寺址가 있었음을 추정하면서 그 유적의 성격을 언급하였다.
구아리 유적에서는 40여 점의 소조상이 출토되었는데 크기에 따라 중형・소형 ・정경소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 소조상의 제작기법은 심목을 사용한 頭體別製式과 손빚기 방식의 성형, 성형 후 채색 등이 확인된다. 이러한 제작방식은 정림사지, 능산리사지, 임강사지 등 사비시기의 소조상 제작 기법과 상통하는 것이다.
구아리 출토 소조상은 목탑 심초석이 함께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목탑의 초층을 장엄하던 塔內塑像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중 두상편1・2는 비탄에 젖은 佛弟子像의 頭像으로 일본 法隆寺 5중탑 초층 북면의 涅槃 장면과 관련이 있다. 또 두상편10의 剃髮을 한 두상과 인물상편, 무사상편 등은 이곳에 禮佛圖 장면이 포함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밖에 佛頭片이나 菩薩像片, 天人像片, 동물상편 등은 이곳에 또 다른 장면이 연출되었음을 알려준다.
구아리 출토 소조상의 제작시기는 제작기법이나 양식에서 정림사지-능산리사지-구아리사지-임강사지와 같은 상대 서열을 정할 수 있으며, 납석제보살상편이나 불상대좌, 연화문와당 등의 공반 자료를 통해 볼 때 대체로 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1942년과 1943년의 발굴조사 지점은 <도면3>과 같이 현재의 구아리 우물지 동북쪽, 관북리 라지구 대형 전각건물 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가 진행된 주변 유적의 층위 상황을 볼 때 이 절터는 관북리・구아리 일대에 대한 대규모적인 대지 조성 사업 이후에 건립된 것이다. 구아리사지는 사비시기 왕궁 북서편에 위치하며 소조상과 더불어 각종 금속제품과 "王"과 관련된 명문자료가 출토된 점을 볼 때 백제 왕실과 밀접하게 연관된 사찰이었다. 그런 점에서 구아라사지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天王寺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