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왕흥사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문헌에 창건(법왕2, 600)과 낙성(무왕35, 634) 관련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 백제시대의 사찰로, 1934년 부여 규암면 신리 일원에서 「왕흥」명 기와편이 수습되어 왕흥사로 비정되었다. 이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1982), 2001년에는 사적 제427호로 승격되었다. 이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2000년부터 현재까지 8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고려시대 건물지, 백제 사찰 가람구조 등이 확인되었으며 사역 동편 외곽지역에서 백제․고려의 기와가마터 11기가 확인되었다.
2007년도 발굴조사(8차)에서 목탑지의 규모 및 구조, 심초석이 확인되었고 사역 남쪽 전면부에서 동서 및 남북석축이 확인되었다. 목탑지의 기단은 이중구조로 하층기단은 잘 치석된 장대석을 이용하였고, 상층기단은 약 0.8m 안으로 들여 시설하였다. 목탑지 내부에는 토심적심시설이 6개소 확인되었으나 정확한 구조를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사방으로 통하는 계단지가 확인되었고 북편 외곽에는 금당으로 통하는 보도석 3매가 깔려 있었다. 목탑지 외부에는 기와편들이 다량 출토되었는데 일부 고려 기와들이 확인되어 목탑이 고려시대까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목탑지 정중앙에서 장방형 석재가 확인되었다. 석재 남당부에는 사리공이 마련되어 있었고 이를 사다리꼴의 석제뚜껑으로 덮었으며 사리공 안에는 사리기가 금제사리병-은제사리호-청동사리함의 3중구조로 안치되어 있었다. 청동사리함 외면에는 5자6행29자의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 창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또는 목탑)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는 내용으로 명문이 음각 시문되어 있어 왕흥사의 창건연대를 알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문헌기록에서 확인된 왕흥사 축조연대 및 백제사에 대한 재검토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동편에는 석재의 설치를 위해 넓고 완만하게 斜道가 마련되어 있었다. 심초석 남족에서는 각종 사리공양구가 수습되었다. 사리공을 피해 심초석 상면 중앙에 방형 판축시설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상부 초석의 적심시설로 추정된다. 사역의 남편에는 축대로 보이는 동서석축과 사찰의 진입시설로 보이는 남북석축이 확인되었다. 동서석축은 목탑지에서 25m 떨어져 있고 현재 길이 95m, 잔존높이 3.8m의 최대 16단이 확인되었는데 중문지로 추정되는 중앙부는 석축이 확인되지 않았다. 전면부에는 기와류가 다량 출토되었다. 남북석축은 문헌기록에서 보이는 御道로 추정되며 동서석축에 직교하게 잇대어져 확인되었다. 조사구역 남단부에서는 남북석축을 일부 파괴하고 우물지와 도수 및 집와시설이 확인되었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사리장치 및 사리공양구가 확인되어 획기적인 자료를 제공하였고, 심초부 조성에 대한 새로운 기법이 확인된 점은 주목되며, 문헌기록과 일치하지 않는 명문이 확인되어 백제사를 재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한 점 등의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또한 중국의 남․북조에서 사용되었던 동전이 출토되어 당시 국제교류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외 각종 사리공양구에서 뛰어난 백제 공예술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되었다. 향후 정밀조사를 실시하여 문헌상에서 확인되는 백제 왕흥사의 위상을 밝혀낼 계획이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