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기초적 분류
1. 시기별 분류
2. 재질별 분류
3. 기능별 분류
Ⅲ. 형태적 분석
1. 명문기법
2. 규격
3. 서체의 문제
Ⅳ. 맺음말
요약
백제 금석문 자료에 대한 형태적 분석을 시도하였다.
한성기의 경우, 금석문 자료의 양이 많지 않으면서 한군현 등 외부 지역으로부터 유입된 외래 자료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유물들은 백제의 국가 권력과 정치적 집중력이 강화되지 못한 단계의 한반도 남서부 지역에서 소규모 지역 집단들이 한군현이나 중국 지역과 자유롭게 직접적인 교류를 행할 수 있었던 백제 국가 형성기의 문화 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웅진시기의 자료에서는 무령왕릉 출토 유물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무령왕릉 출토 유물 역시 중국 남조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지만, 그 속에는 백제의 토착적 문화요소가 반영되어 있다. 사비기에는 금석문 자료의 유형이 다양해지고 그 양도 큰 폭으로 늘어나게 된다. 기와에 도장 글씨를 찍은 인장와나 목제 금석문 자료인 목간이 이 시기에 처음으로 나타나면서 백제 기록 문화는 보다 풍부한 내용을 갖추게 된다.
목제 금석문 자료인 목간 중에는 대나무 소재의 죽간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백제에서 죽간이 사용되지 못했던 것은 당시의 기후 환경 하에서 백제 중심 지역에 대나무가 자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능을 중심으로 한 자료의 분류에 있어서는 명문을 담고 있는 금석문 자료 자체의 기능과 거기에 담긴 명문의 기능과의 일치 여부에 따라 ‘명문전용 금석문’과 ‘보조명문 금석문’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사비기 인장와에 찍힌 도장 글씨의 위치 표시 기능은, 웅진기 전축분 내에서 위치 표시 기능을 가진 ‘대방’, ‘중방’명 명문 벽돌로부터 영향받은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나 고구려와 달리 백제의 금석문에 국토의 영역을 표시하는 척경비 성격의 석비가 알려져 있지 않는 점도 이채롭다. 이러한 현상은 마한의 중심지 병합을 통하여, 최소한 명분상으로는 마한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던, 백제 영역 확장 과정의 특수한 경험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