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扶餘 東南里 石築우물에서 출토된 木簡과 錦山 栢嶺山城에서 출토된 墨書銘 木製品 및 文字瓦에 대한 내용 소개와 함께 그 성격을 살펴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동남리출토 木簡은 石築우물의 바닥층에서 1점이 출토되었는데, 이 우물은 부여 동남리건물지의 북편에 연접하여 위치하고 있다. 동남리 석축우물 출토 木簡의 제작시기는 石築우물의 조영시기와 관련하여 백제시대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우물 내부의 堆積層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백제시대 유물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유물이 다수 확인되고 있다는 점에서 木簡의 제작시기를 단정하는데 한계가 있다. 木簡의 내용은 다양한 이견이 있지만 “宅放禾田犯 ? 兄者爲放事”로 비정하였다. 그리고 6번째의 불명확한 자는 ‘則’, 또는 ‘時’로 추정해 보았다. 이 경우 그 의미를 추구해 보면, 「宅에서 沓(禾田)을 넓히는 것을 犯한 則(또는 범할 時) 그대는 흩어지는 일이 發生할 것이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고려된다.
백령산성에서는 墨書銘 木製品과 다량의 文字瓦가 출토되었다. 墨書銘의 내용은 전혀 파악되지 않지만 크기와 잔존하고 있는 字의 기록방식을 통해 볼 때 다수의 字가 기록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산성 내에서 文書行爲가 행해진 사실을 보여 준다. 銘文瓦는 3종류의 干支가 확인되었는데, 干支가 가리키는‘丙辰’·‘丁巳’·‘戊午’는 백제 위덕왕 43년(596)·44년(597)·45년(598)으로 비정된다. 그리고 栗峴과 耳淳辛은 기와를 생산한 地域名, 또한 ‘上水瓦作…’銘 印刻瓦는 백제시대 암키와와 수키와에 대한 명칭과 함께 제작지, 그리고 물자의 유통관계를 알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