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연동리사지 발굴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내진고주는 초석을 사용하지 않은 굴립주였다. 불전 주변에서는 회랑 등의 유구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는 현재까지 밝혀진 백제의 평지가람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으로 연동리사지는 좀더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겠으나 불전만 갖춘 백제의 새로운 가람의 유형이 아닌가싶다.
연동리 사지에서는 방형초석의 사용이나 수키와의 제작에 있어서 내->외의 절ㄷ간기법, 석불좌대나 광배대석의 하부에 보이는 굴광판축기법들은 미륵사지 등에 보이지 않는 보다 선행된 기법으로 7세기 이전의 부여지방 사찰건축 전통이 이곳에 이어진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연동리사지는 부여의 군수리사지 등의 불사에 직접 관여한 사람들에 의해 무왕 즉위초인 7세기경 창건된 것으로 판단된다. 미륵사지 기와와의 비교를 통해 연동리사지는 13세기쯤 폐사
현재 사자암을 사자사로 보기 위해서는 백제 유물의 검출이 필요하다. 익산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어야 하며 왕이 출입하던 사찰이라면 가람 배치가 보여야 한다. 연동리사지가 첫 번째 조건이나 위치를 만족시키나 가람배치에 있어서는 앞으로의 조사가 필요하지만 현단계에서는 연동리사지를 사자사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연동리에 백제사찰이 지어진 것은 추론에 불과하나 익산지방은 마한의 중심지였으며 백제시대에 있어서 무왕의 천도지 혹은 별도였다고 전해지는 지역이다. 어쨋든 익산지방에는 백제의 무왕과 관련된 유적들이 산재해 있음은 분명하다. 연동리사지가 무왕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자사라면 익산진출을 통한 왕권강화라는 무왕의 정치적 야심을 실현하기 위하여 연동리사지가 창건된 것이 아닌가 싶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