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의 미륵사는 그동안의 연구결과 및 지금까지 진행된 발굴조사에 의해 백제 창건 사찰이 분명하게 되었다.
삼국사기 기록 중 미륵사와 왕흥사가 내용상 혼동을 불러 일으케됨으로써 해석에 혼란이 있으나 현존 왕흥사터와 미륵사터의 주변환경을 비교할 때, 법왕금살조에 나타나는 미륵사는 왕흥사가 분명하다.
미륵사는 3개의 탑과 금당, 그리고 회랑을 다로 배치한 삼원식가람으로 조성되었는데 이는 미륵하생기 및 성불경중 미륵불이 장차 출현하여 3회에 걸쳐 설법함으로써 중생을 제도한다는 내용에 기인하는 것이다.
미륵사지는 단순 사찰 기능을 넘어 미륵신앙의 궁극적 세계와 이상의 용화세계를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 실천의지로 창건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륵사지는 발굴 조사 결과 사역 중심과 그 주변에서 초창기 건물지가 폐쇄된 이후 후대 건물지가 많이 조영된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미륵사지 존속기간은 조선시대 중기까지 이어진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나 어느 정도 사세가 컸던 시기는 고려 말경으로 조사된다.
미륵사지는 미륵신앙이라는 매체를 통해 당시 왕실, 민중이 어려운 정세에 대처하면서 정신적인 힘을 모으고 나아가 이상향인 용화세계를 구현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