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리옹관묘의 전통을 이어 영산강유역에서 전개된 대형옹관묘문화는 3세기대 마한제소국의 군장계실력자들의 무덤에서 시작되어 5세기에 이르러 마한을 정복한 백제세력에 의해 그 전통이 끊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새로운 묘제인 석실분의 등장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이는 연구자들 사이의 잠정적 동의에 불과하다.
영산강유역에서 기원전후 1세기경의 신창리옹관묘가 대형옹관묘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한강유역 원삼국묘제의 영향을 받아 분구묘로 발전한 것으로 보이며 3세기대에 이르러 고대한 분구를 갖추게 되고 내부주체시설로는 토장과 옹관장이 병용된 다장식묘제로 발전하였다고 판단된다. 한편 영암 옥야리 신산고분, 월송리 송산고분과 같이 소형분구에 단독장인 경우가 있는데 이들은 옹관의 특징과 부장품에서 다장식옹관보다 앞서는 고식이다. 이같은 발전단계의 해석에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면 3세기대에 들어와 단독장으로 출발한 옹관묘는 한강유역묘제의 영향으로 남해를 중심으로하는 삼포강유역에서 분구시설이 고대화하며 그 성격도 다장식가족공동묘로 변화발전하였다. 그리고 4세기 중반에는 광활한 나주평야의 중심지이며 수로 이용도 편리한 반남지역으로 옹관묘의 중심권이 이동되었다고 생각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