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土器는 燒成度에 따라 軟質, 瓦質, 硬質의 三種으로 區分할 수 있다. 土器의 器種은 壺가 절대량을 차지하고 있지만 生活用器인 鉢, 大接, 盒, 盞, 盌, 瓶, 燈盞, 자배기, 시루(甑) 등 많은 器種을 골고루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한편 高杯, 三足土器, 蓋杯, 방울잔 등의 儀器用으로 만든 土器도 여러 종류가 있다. 40餘種을 종합 분석한 내용과 古墳編年을 바탕으로 百濟土器의 年代를 4期로 區分해 보았다.
초기(1세기초반~3세기초반)는 서울가락동 2호분 토기를 표식으로 삼았으며 흑유, 이중구연호, 승문 평저 난형호 등 초기 백제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석촌동 토광묘의 파수부용기, 원저호 등도 무문토기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는 공주 남산리 우각형 파수부용기 등도 백제초기의 특징을 지닌다.
전기(3세기 중반~4세기후반)는 청주 신봉동 토광묘의 호, 파수부배이며 다장제 성격도 서울 가락동, 석촌동 토광묘와 공통점을 보여줘 주목된다. 토착인들의 전통묘제가 청주지방에 잔존함을 의미한다. 화성 백곡리 석실분 호도 기형과 문양이 한식토기의 영향을 받은 기형이며 공주 봉하리, 웅진동 석곽옹관묘의 옹도 난형과 구형이 혼재되고 격자문과 승문 및 다장제의 장법 등으로 보아 4세기로 편년된다.
외에 남원 두락리 옹관묘의 옹과 토기, 고성 신월리 옹관묘 토기로 추정되며 영산강 유역에서 조사된 옹관묘 출토 토기들은 3세기 후반~ 4세기 후반까지 약 100여년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내동리 5호분 우각파수부토기, 장경호 등은 초기 기법이 이어진 고식이며 영암 만수리 2호분 토기, 나주 신촌리 9호 옹관묘 토기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중기(5세기초반 ~6세기초반)는 익산 신흥리 원저난형호, 고배식 기대, 소형 파수부배 등이 유력하다. 서울 가락동 3호분 세경평저호, 송산리 5호분 세경펑저호는 동일한 양식으로 연대도 비슷하다. 공주 웅진동 8호분 호, 해남 월송리 조산고분 토기, 특히 유공호 2점은 전남지방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후행하는 형식이다.
후기(6세기 중반~7세기 중반)는 구형호가 장견화되어 광견형으로 발전되고 문양도 결합문이 성행되었으며 원저도 있으나 평저가 많은 점유율을 보인다.
고배와 대부호는 대족이 차츰 낮아지기 시작하고 중국 남조 영향을 받은 사이병, 삼족토기, 인공시유기 등 새로운 기형이 출현한다. 보령 구룡리 삼족토기와 광견호, 공주 중사리 삼족토기, 논산 표정리 석실분 출토 대발 등이 모두 이 시기에 해당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