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왕대에 세워진 미륵사는 동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대찰이었다. 따라서 미륵사 삼원의 금당에는 당시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실제로 발굴을 통해 출토된 불교조각 유물은 매우 단편적인 후대의 유물뿐이고 창건기의 불교조각의 면모를 알려줄 만한 유물은 희귀하다. 그 가운데 전불 보살상과 판불 천부 상, 소조 나발 등이 창건기 불교조각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전불 보살상은 입체적이고 양감이 훌륭한 조각으로 세부표현에서 일본 白鳳시대 보살상들과 유사점이 발견되는데, 백제에서 전불이 활발하게 제작되었을 개연성을 보여준다. 금동판불천부상은 금동번이나 천개에 매달려있던 장식으로 생각되며 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작되었다고 생각되는 금동제 투각 보상화문 장식과 여러 장식편들도 같은 용도도 금당 내부를 장식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미륵사 서원 금당지와 서탑지에서 발견된 2종류의 소조나발은 창건기에도 소조불상이 봉안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특히 서원 금당지 출토 대형 나발은 비록 후대 불상의 나발로 추정되어 오고 있지만, 창건기에도 이와 같은 대형의 미륵불상이 봉안되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미륵사의 가람배치는 발굴을 통해 삼원병렬식으로 이루어져 있던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삼국유사와 같은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뒷받침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삼원병렬식 가람배치는 南朝 梁代의 <미륵하생변상>에 보이는 `龍華三會` 의 장면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미륵사 삼원 금당의 주존불은 모두 미륵불상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 모습은 신라와 중국의 재명 미륵불상들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시무외여원인의 통인을 결하고 있는 일반적인 여래상 형식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양식적으로는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두부缺失)과 제석사지 폐기장출토 소조천부상 두부, 서산마애삼존불상의 본존불입상 등과 같은 7세기 전반의 불상들을 통해서 볼 때 양감이 넘치고 사실적인 조형감을 보이는 불상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재료면에서는 여러 가지 가능성이 상정되나 지금으로서는 소조불상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