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한성시기 연화문와당의 출현
Ⅲ. 웅진시기 연화문와당의 주요 출토 유적
Ⅳ. 웅진시기 연화문와당의 성립
Ⅴ. 웅진시기 연화문와당의 형식과 특징
요약
그 동안 백제 연화문 와당은 한성시기에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8년 풍납토성에서 확실한 백제유구와 함께 연화문와당이 출토됨으로써 한성기 연화문와당 출현문제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런데 한성기의 연화문와당과 웅진기의 연화문와당은 형식상 상호 관련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풍납동 토성 출토 연화문와당은 북위의 연화문와당과 친연성이 아주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북위의 영향 아래에서 소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편년은 한성시기 후기 즉 5세기 중후반 경으로 설정할 수 있다.
웅진시기 연화문 와당이 출토되는 유적은 공산성을 비롯하여 대통사지와 봉황동과 중동지역, 정지산유적 등 10여곳에 이른다. 웅진시대의 연화문와당은 판단융기형과 판단장식형으로 대별되며, 이들 형식의 와당만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형식의 연화문와당은 한성시기에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웅진식에 새롭게 등장한 신형식의 연화문와당이다.
한성기와 웅진기의 연화문와당은 막새면의 관찰 결과 공통점은 수막새만 출토되고 있으며, 연판의 길이가 자방보다 짧고, 주연이 높고 넓다는 것이다. 한성시기의 연화문와당은 6엽 단판이며, 연판의 문양이 능형에 가깝고, 자방이 2중 원권을 이루며, 자방내에 연자와 같은 큰 돌기가 있고, 연판의 반전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웅진기의 연화문와당은 8엽연판이 주를 이루며, 연판의 문양이 舌形이고, 자방은 1조 원권을 이루며, 사이잎인 간판이 있고, 자방내에 연판수와 같은 1+8과의 연자가 등장하고, 판단에서 연판의 반전수법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공통점과 다른 점이 분명하게 대비되고 있으며, 웅진기에 새롭게 나타난 부드러운 곡선미와 역동적인 반점감이 있는 연화문이 이후 백제시대 연화문와당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발전을 거듭하여 다양한 형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웅진기의 연화문와당이 한성기 양식을 계승발전시키지 않고 새로운 양식의 연화문와당으로 거듭나게 된 배경은 중국과의 문화교류 속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백제인들이 각각의 요소들을 잘 소화하여 곡선미와 반전수법을 잘 살린 백제 특유의 연화문와당을 창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용주체에 관해서는 웅진시기에 한해서 연화문와당은 국가와 관련된 곳에서만 출토된 점으로 보아 그 사용주체가 왕실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