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한성시기 연화문와당의 출현
Ⅲ. 웅진시기 연화문와당의 주요 출토 유적
Ⅳ. 웅진시기 연화문와당의 성립
Ⅴ. 웅진시기 연화문와당의 형식과 특징
Ⅵ. 맺음말
요약
백제 한성시대에 기와가 과연 소성되었가의 문제는 1980년대 초까지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서울 석촌동 4호분 주변에서 기와가 출토되면서부터 한성시대 백제 기와 소성문제는 일단락지어졌다. 또한 한성기 연화문와당의 출현 문제는 2008년 풍납토성 경당지구와 미래지구 유구에서 연화문와당이 출토됨으로써 역시 그 의문점이 해소되기에 이르렀다.
웅진시대의 연화문와당은 판단융기형과 판단장식형으로 대별되며, 이들 형식의 와당만이 유행하였다. 2가지 형식 가운데서 웅진시대의 연화문와당은 판단융기형이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판단융기형은 판단의 볼륨조정에 의하여 꽃잎 끝이 자연스럽게 솟고 있는 모습을 형식화한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연화문와당은 한성시기에 전혀 보이지 않으며, 웅진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신형식의 연화문와당이다. 이 와당의 가장 큰 특징은 연판 안에 문양이 없는 素文으로, 연판이 이중으로 겹치지 않고 한판으로 이루어진 素文單瓣 양식이다. 그리고 연판이 기본으로 8엽이며, 반전수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공산성과 정지산 같은 웅진시대 초기 유적에서 고구려 영향을 받은 형식의 와당이나 한성시대의 형식을 계승한 와당이 출토되지 않기 때문에 중국과의 문화교류 속에서 그 연원을 찾으려는 노력이 집중되고 있다.
5세기 중엽부터 웅진시대까지 백제와 중국과의 대외관계 기록은 7건에 이른다. 남조 宋(420~479), 南齊(479~502), 梁(502~557) 나라와 계속해서 교류하고 있었고, 북조의 北魏(386~534)와도 한 차례 사신 파견 기록이 있다. 이처럼 문헌에 의하면 백제는 남북조와 모두 교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교류는 분명히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중국고대의 연화문와당과 웅진시기의 연화문와당이 같은 형식은 아니다. 다만 원형의 연화문와당, 소문단판 형식의 연화문, 둥근 자방과 그 안의 연자, 주연 등 기본적인 모티브는 모두 중국 고대와 남조의 연화문와당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웅진시대 연화문와당의 전체적인 연원은 이들 중국 와당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이며, 백제인들이 각각의 요소들을 잘 소화하여 공산성 판단융기형 연화문와당과 같은 백제 특유의 연화문와당을 창안하였다고 보여진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