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는 佛敎를 日本으로 전수하였다. 백제가 불교왕국으로 성장되면서 그 위세를 떨친 흔적은 도처에서 찾을 수 있다. 백제 고도 부여 주변에서 발견된 寺刹유적의 수는 20개소를 넘으며 매우 조밀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백제 왕도 泗沘城은 명실 공히 佛都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던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백제가 聖王19년(541)에 남조의 양나라로부터 涅槃經등의 불교경전을 얻어온 사실은 『삼국사기』에 기록을 남겨둘 만큼 큰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남조로부터의 불교 전파 내지 교류는 왕실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음으로 불교문화는 백제에서 크게 개화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불교와 비교할 때 남조의 도교는 주로 민간을 상대로 유포되었으므로 그것이 바다를 건너 백제로 수입될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사회는 도교를 수용하지 못했던 나라로 인식되어 왔으며 『北周書』 百濟傳에는 「僧尼寺塔甚多 而無道士」라고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백제 왕도에서는 道觀이나 道士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인지도 모른다. 왕실의 피호와 재정적 지원 없이는 도교의 개설과 공식적 활동은 바랄 수가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로서의 도교는 정착되지 못했으나 그 기반을 형성한 도교사상의 일부가 다른 남조의 문물 사상등과 함께 백제사회에 유입된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백제 武王35년(634)에 宮南에 大池를 만들고 못안에 方丈仙山을 축조하였다는 사실은 神仙思想의 영향이 왕실에 미쳤음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武寧王陵에서 발견된 買地券도 도교사상의 산물로 들 수 있다. 이번에 부여 陵山里의 王陵墓域에서 발굴된 金銅龍鳳蓬萊香爐 또한 신선사상의 대표적 유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글은 陵山里香爐의 발견을 계기로 삼아 백제미술품에서 엿볼 수 있는 도교적사상, 도교적요소들을 찾아서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필자 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