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석탑과 정림사지석탑 가운데 미륵사지석탑이 정림사지석탑보다 앞선다. 이를 뒷받침하는 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석탑의 조형형식에 있어 원시적인 모습과 더욱 발전된 전형적인 모습으로 그 선후를 정할 수 있겠다.
둘째, 삼원가람인 미륵사에서 목탑과 석탑이 같이 있다는 점은 무척 많은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셋째, 건탑기술의 입장에서 보면 미륵사지석탑은 거대한 석조물을 축조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부분에서 구조적으로 불합리한 점이 많은 반면, 정림사지석탑은 미륵사지석탑의 기술적인 결함을 참고 보완한 것이라 하겠다.
넷째, 가람에 있어서 당탑의 불전에 대한 가치변화 즉 크기의 변화가 축조시기의 선후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다섯째, 문명대는 550년경의 불상양식과 정림사지석탑양식은 서로 일맥상통하고 우아하며 날씬한 귀족적인 미를 잘 보여주고 있어서 정림사지석탑이 백제말에 조성되었다는 설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같은 주장은 불탑과 불상의 형식이나 양식적인 문제의 상이성을 외면하였고 또 석탑의 양식 전개에 따른 해석상의 문제를 고려에 넣지 않은 결과라 하겠다.
여섯째, 홍재선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익산에서 정림사지석탑보다 먼저 시작한다는 것은 어딘지 어색하다 하였다. 그러나 익산은 수도인 부여에서 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한때 왕도였거나 이궁, 별도 또는 천도의 예정지로 믿어지는 곳이고 <삼국유사>·<삼국사기>·<동국여지승람>의 여러 기록으로 보아 이곳이 백제 무왕과 깊은 관계가 있는 연고지임은 의심할 바 없다.
일곱째, 윤무병의 주장대로 정림사의 창건연대와 동일한 시기인 6세기 전반기에 정림사지석탑이 건립된 것이라면 정림사 창건 이후에도 백제에서는 사찰이 다소 창건되었을 것인데 왜 불에 타지 않고 관리에도 편한 석탑이 미륵사 이외에는 건립되지 않았는지 의문스럽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양식이 조영되면 그 초기에는 신양식이 널리 퍼지기 마련인데 정림사지석탑이 건립되고 나서 100여년 동안이나 석탑이 건립되지 않은 점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신라에서는 감은사에서 석탑이 건립되자 그 이전의 사찰에서는 모두 목조탑을 건립하였던 것이 일변하여 석탑이 불탑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6C초에서 7C초까지 100년이라는 석탑의 공백기가 너무 길어 정림사지석탑의 건립시기를 6세기 초반으로 올려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양 석탑건립시기의 선후는 탑파의 양식, 건탑기술, 규모, 미륵사라는 사찰의 성격, 석탑건립선후의 연계성 등으로 보아 미륵사지석탑이 앞선다고 하겠다. 물론 정림사가 미륵사보다 먼저 창건된 사찰로 추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미륵사가 창건된 무왕대인 600-641년, 혹은 진평왕의 미륵사 건립시에 도운 까닭에 진평왕의 재위기간인 600-631년과 백제의 부여도읍기간인 538-663년 사이에서 서로 중복된 시기인 700년대 초반에 미륵사탑이 먼저, 정림사탑이 나중에 건립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겠다. (필자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