鐵器가 古代 社會에서 차지하고 있는 의미는 새삼 부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인데, 본고는 東西文化의 가장 동쪽 외연에 있는 馬韓과 百濟의 철기 제작 기술을 실제 분석을 통해 그 일면을 밝혀보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천안 新豊里와 大田 九城洞遺蹟 土壙墓에서 출토된 철기들에 대한 分析을 통해 原三國~百濟 初期에 걸친 철기 제작 기술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신풍리유적은 전형적인 원삼국시대 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인데 비해, 구성동유적은 백제가 금강유역권으로 본격 진출하는 시기인 4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조영된 유적으로서 한성백제 중앙 토기가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지는 않으나 일부 그 영향이 미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는 단계이다. 즉 구성동유적은 백제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하는 단계로서, 신풍리유적 조영 집단과는 그 정치적 성격에서 차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분석 결과 두 유적에서 출토된 철기는 塊練鐵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제작 기술상에 큰 차이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두 유적이 조영 시기나 유적 성격에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기 제작 기술에서는 거의 동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약간 의외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으나, 이 분석 결과가 백제 한성기의 철 생산 기술을 대변한다기 보다는 지역적으로 철기 생산이 소규모로 이루어진 곳이 존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지 않을까 한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