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영역에서는 한성기나 웅진기로 추정되는 치미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웅진기의 경우 무령왕릉의 예에서 보이듯이 6세기 초 중국 남조 양에서 새로 전과 기와를 만드는 기술이 알려진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확실하게 백제 시대의 것으로 인정되는 치미가 출토되는 곳은, 사비성으로 천도한 뒤의 유적으로, 절터를 중심으로 약 20사례가 알려져 있다.
사비시대의 백제 양식 치미중 가장 고식은 측면 전체를 좁은 단의 형태로 깎아내고 縱帶를 단차와 침선으로 표현한 치미이다. 정암리 요지에서는 종대의 형은 알 수 없으나 비슷한 몸체 편이 출토되고 있으며 6세기 후반의 수막새가 공반되고 있다.
이러한 단과 종대 이외의 문양을 갖지 않는 백제 양식의 치미는 다음 단계에는 종대를 돌대로 표현하게 된다. 금강사 출토의 치미는 좁은 종대를 깎아 내고 鰭部 단면에도 단을 확실히 드러낸다. 복부에도 문양이 있는데 이는 새로운 요소이다.
종대는 더욱 발전해 군수리 폐사지의 사례나 부소산 출토의 치미를 보면 돌대가 2조로 구획된 장식대에 인동당초문을 깎은 좋은 예이다. 또한 군수리 폐사지의 사례는 상하 분할식의 치미인 것을 파편을 통해 알 수 있다.
일본에서의 백제 양식 치미의 전개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비조사의 A형식이나 B형식을 전형으로 하는 일본 최고의 치미의 특징은 양측면에 좁은 단을 깎아 표현하고 기부를 간소한 종대로 구획한 것이다. 7세기 전반대에 이 백제 양식이 주류를 차지해, 단이나 종대의 폭이 조금씩 넓어지고 두꺼워지는 것으로 변화한다. 또한 기부의 단은 처음에는 양면에 나타나는 것이 많다가 점차 외양에만 나타나는 간략화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몇몇 개열이 나타나면서 8세기 초까지 이어진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