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리말
2. 경부자은(輕部慈恩)씨의 설
3. ?무령왕릉? 보고서설
4. 전2설에 대한 비판
5. 무령왕릉, 송산리5·6호분의 편년적 서례와 5·6호분의 피장자 고찰
요약
충청남도 공주군 공주읍에 백제시대 고분군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벽화가 있는 송산리 6호분과 그 동쪽에 있는 전상석재구축의 5호분이 일찍부터 발견되어 경부자은시에 의해 조사·발표되었다. 1971년 7월 새롭게 무령왕릉이 발견되고, 한국정부에 의해 조사된 후 보고서도 출간되어 백제연구에 커다란 전환점을 가져왔다. 경부씨는 5~6호분의 서남쪽에 있는 29호분에 대해서 바로 남쪽에 있는 교촌리고분군 2·3호분과의 관계를 중요시하였다. 이 고분들은 폐분 또는 미완성 고분이고 그 벽돌이 송산리 5·6호분 등에 전용되었다. 3호분 앞에 발견된 석실분은 3호분의 배총으로 밝혀졌다. ?무령왕릉? 보고서에 이에 대한 견해를 감안하면서 무령왕릉과 6호분의 시기적 서례를 고찰했다. 즉 무령왕릉의 현실, 연도의 벽돌은 연화문이고, 6호분은 전문(錢文)이다. 무령왕릉에는 연도폐쇄전 가운데 전문인 것도 있고, 6호분은 연화문이다. 무령왕릉의 현실, 연도에 사용된 연화문 벽돌은 교촌리 2호분의 벽돌과 같은 형식이기 때문에 전문 벽돌을 주로 사용한 6호분보다 시기적으로 빠름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위치관계나 배수구의 관계를 통해 증명된다.
본고에서는 경부씨의 교촌리고분군에 대한 해석을 부정한다. 이것들은 후대에 황폐화된 것으로 교촌리 6호분의 경우 배총이 아니라 3호분보다 시기적으로 늦은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연도폐쇄 벽돌은 시기를 결정할 수 없었다. 물론 무령왕릉과 6호분과의 시기관계는 각각 연화문, 전문이라는 다른 문양의 벽돌을 사용하고 있는 점을 통해서 파악해야 하며, 중국고분의 사례를 통해 전문벽돌을 사용한 6호분이 선행하는 고분임을 검토했다. 6호분, 무령왕릉, 5호분의 시대적 순서는 동일 가계의 왕릉의 복합체로서 6호분을 무령왕의 아버지인 동성왕, 5호분을 무령왕의 아들 성왕으로 판단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