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백제의 횡혈식 석실분의 초기자료로서 한강하류 지역에서 확인된 횡혈식 석실분을 예로 고찰하였는데 최근 새로운 자료의 증가에 따라 이 지역 고분의 조영 주체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져왔고 그 결과 한강하류 지역의 대부분 횡혈식 석실분의 조영 주체가 백제보다는 고구려 신라로 비정된다. 특히 서울의 가락동 방이동 고분군도 이 지역이 백제 고분군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단각고배와 같은 유물을 근거로 조영주체를 백제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 지배적 의견으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백제의 남천 후 축조된 고분과 남천 이전 고분과 구조형식을 비교, 검토하고 아울러 고분의 분포현황 등에서는 상이점보다 유사점이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출토된 유물의 속성 등을 고찰할 때, 고구려, 신라보다는 백제 횡혈식 석실분의 초기유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확인된다.
백제고분의 분포현황으로 미루어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후 기단식 적석총을 조영했다는 흔적은 전혀 확인할 수 없다. 또한 후기의 횡혈식 석실분의 축조술 등으로 미루어 이 유형의 고분은 이미 상당한 조영 경혐의 축적위에 조영된 것으로 확인된다. 한편 하강유역의 가락동 방이동의 횡혈식 석실분은 축조술이나 재료, 축조형식에서 후기의 횡혈식 석실분 중 궁륭형 천정축조를 지닌 유형과 형식적으로 상통한다. 이 지역의 고분은 초기 발굴과정에서 아류적 형태의 산출이 있었다면 후기 고분과 축조적으로 상이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특히 출토유물의 경우 그것이 비록 신라의 속성과 일치하더라도 같은 형식의 유물이 백제사회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이 확인되며 이로서 이 고분들을 신라고분으로 볼 적극적 증거는 되지 못한다.
한강유역의 가락동 방이동 석실분은 백제 횡혈식 석실분의 초기유형으로 존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더불어 이들 고분은 기단식 적석총을 대체한 새로운 묘제로서 위치하는 바 이의 연원은 기단식 묘제에서 파생된 것, 혹은 고구려 횡혈식 석실분의 영향, 낙랑 전축분의 영향으로 축조되었다는 연원의 고찰이 있었다. 그러나 백제의 고분 축조형식으로 미루어 이들 배게 횡혈식 석실분의 연원은 궁륭형 천정형식으로 일반화되는 낙랑의 전, 석 혼축묘와 석실분의 존재로 미루어 연원을 구해야할 것이며 그 시기는 백제가 대동강 유역까지 진출한 4세기 후반에 이미 백제사회에 이 묘제의 기법이 유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