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유역의 토착세력은 상당히 오랜 기간 백제와 병행해서 독립된 정치체를 형성하여 오다 백제의 근초고왕대에 이르러 통합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영산강 유역 토착세력에 대해서는 그 고분자료로 설명되어진다. 영산강유역에서만 토착묘제가 대형화되는 현상은 서울, 충청지역에서는 새로운 이주민에 의한 백제 건국과 발전으로 토착세력의 힘이 상대적으로 위축된데 반해 영산강유역에서는 백제의 영향권 밖에서 토착 세력에 의한 독자적 정치체가 성장하면서 권력 규모에 걸맞는 토착묘제의 대형화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전북지역의 옹관묘들이 영산강유역 옹관묘와 달리 대형화하지 못한 원인을 백제 지배세력 영향으로 보는 견해는 영산강유역의 이런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반증자료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영산강 유역 옹광묘는 그 하한이 5세기말~6세기초 영산강유역에서 석실분을 사용하기 시작했던 사람들은 백제 중앙에서 파견 나온 새로운 관리라기보다는 대형 옹관묘를 쓰던 기존의 토착세력가일 가능성이 높다. 고대 사회에 있어 묘제의 변화와 같이 커다란 문화변동은 정치변화에 수반된다는 점에서도 옹관묘 사회가 석실분사회로 통합됨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옹관묘 축조 세력은 새로운 체제 속에서도 여전히 권위와 기득권을 잃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백제의 무력에 의한 일방적인 것보다는 평화적 제휴에 의한 것이었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