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촌동 출토 칠기류가 기종에 있어서 낙랑계 칠기류와 이어지지만 문양, 시문방법 등에 있어서는 의창 다호리, 함평 초포리, 아산 남성리 등 한 대 이전의 전통 칠기와 연결되고 있다. 이를 종합하여 보면 우리나라 칠기의 계보는 다음의 표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4세기 이후 왜 신라고분에서만 칠기가 나타나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한 분석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지만 일단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즉, 중국의 칠기는 한 이후 육조시대로 들어오면서 도자기의 증가와 함께 쇠퇴하게 되었는데 육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백제에서는 원성군 법천리, 석촌동고분군, 몽촌토성, 천원군 화성리, 무령왕릉 등지에서 출토된 자기류가 시사하는 바 중국과 동일한 맥락에서 칠기의 명맥이 끊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육조와 큰 교류가 없었던 신라에서는 자기류의 사용이 활발하지 못하여 종래의 칠기제작이 지속됨으로써 당대에는 신라칠이라 하여 중국에까지 수출되었고 고려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는 나전칠기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 맺음말)
(서울 石村洞出土 百濟漆器와 中國漆器와의 關係, 진단학보66호 수정보완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