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에 해당되는 시기의 제사는 토기가 중심을 이루는 露天祭祀이다. 제사행위가 이루어진 祭場은 이미 일부가 破壤 流失되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현재의 水城堂 뒤편의 20x30m 정도의 공간으로 추정된다. 이곳에 각종 유물이 집중되어 있었고, 주변에서 제일 높은 지점이며, 神의 居所나 聖所로 추정되는 堂窟과도 가장 가까운 지점이기 때문이다. 제사를 지낸 대상은 해안가 절벽위를 선택하고, 출토된 유물 중 바다를 통한 외국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中國製 陶磁, 石製模造品이 출토되었으며, 또 水靈信仰과도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土製馬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海神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유적이 위치한 지점이 해로상의 요충지이며, 漁撈活動에도 유리한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으로 왕래하거나 이 일대의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배들이 빈번히 다녔을 것이다. 또 항해에 불리한 조건으로 遭難의 위험이 많아 신에게 뱃길의 안전을 빌었을 가능성이 높은 지점이다. 따라서 海神에게 기원하더라도 그 주요목적은 항해상의 안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몇 개의 단계별로 제사양상을 간략하게 살펴볼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단계는 제기로 壺 중심의 토기만 사용하여 음식이나 술 등을 신에게 바치고, 별도의 供獻物이 없던 단계로 구체적인 시기는 4세기 전반에서 4세기 후반까지로 추정된다. 두 번째 단계는 壺, 甕, 器臺 등을 제기로 사용하여 음식이나 술 등을 신에게 바치고, 별도의 供獻物로 土製馬, 石製模造品, 각종 鐵製․靑銅製 武器와 馬具, 中國製 靑磁耳附盤口壺를 사용한 단계이다. 구체적인 시기는 5세기에서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되고 본 유적에서 가장 중심을 이룬다. 마지막 단계는 제기로 短頸壺, 甁, 장군 등만 사용하여 神에게 음식과 술을 供獻하되 두 번째 단계와 같은 화려한 供獻物이 없던 단계이다. 구체적인 시기는 6세기 중반에서 7세기 전반에 해당된다. 이 당시의 백제의 南遷하여 錦江下流의 熊津과 泗沘에 자리잡고 있어서 海路를 이용하여 國都로 들어가려면 錦江入口로 접근해야만 한다. 따라서 錦江入口를 감시하기 좋은 이곳에서 國都로 들어가려는 많은 배들에 의해 제사가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어로활동을 위해서 이곳을 왕래하던 배들도 잠시 기착하여 제사를 지냈을 가능성도 있다. 제사주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推論하기 어려우나 출토된 유물의 일부가 益山 新龍里, 井邑 雲谷里 출토품과 연결되기 때문에 土着勢力일 가능성이 많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