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도성에는 조방제를 이용한 도시계획이 이루어졌음을 발굴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조방제는 이미 중국의 비롯한 동양 여러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도시계획 기법이었고 이는 고구려, 신라의 왕경에서도 확인된 바가 있다.
그러나 왕궁의 규모와 배치계획이 어떠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사비시대의 왕궁의 위치만 확인될 뿐이다. 백제의 불사건축은 그 규모와 배치구조가 확인되고 있다. 백제의 가람 배치구조는 1탑1금당식이었다. 다만 웅진시대 절터 중에는 인근에 석굴이 있어 불교 도입과정에서 인도나 중국의 석굴사원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또한 사비시대 동남리 절터의 탑자리가 명확치 않아 혹시 무탑식이 아닌가 추측된다. 백제의 주거는 명확하게 남아있는 것이 움집뿐이다. 그러나 도성 내에 지배계층의 주택이 존재했으므로 이에 대한 추정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백제는 고구려, 신라보다 남아있는 건축 유구가 적다. 그러나 이 유구를 통해 건축기법을 고찰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기단은 판축기법과 석축기단과 전축기단이 사용되었다. 전과 흙을 번갈아 깔면서 만든 기단이나 와축기단은 백제에서만 볼 수 있다. 2중기단은 백제에서 주로 보이는 형식이다. 백제시대 초석은 간단히 가공된 초석만 사용하였다. 기둥은 현존하는 것이 미륵사 서탑 1층屋身에서 볼 수 있는 석재 민흘림주 뿐이다. 쓰여진 기둥은 단면으로 보아 원주, 방주, 8각주가 있었고 외형상으로는 통주, 민흘림주, 배흘림주가 사용되었다고 하겠다. 공포는 기둥위에만 구성되는 주심포작으로 하고 제공첨차를 2~3단올려 만든 형식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人字臺工이 사용되었다고 보는데 육조시대에 있었던 曲脚人字栱은 아직 쓰여지지 않고 직선형만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의 공포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가 심층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백제의 지붕 중에는 꺽음팔작지붕 흔적이 보이는데 이것은 한 대의 유구에서 조기의 것이 보이며 육조시대에는 그 흔적이 명확히 나타나는바, 백제에서도 사용했다고 본다. 따라서 기술적으로 이보다 간단한 팔작지붕, 우진각지붕, 모임지붕, 맞배지붕은 당연히 사용되었을 것이다. 건축기술은 삼국 중에서도 백제에서만 볼 수 있는 건축기법이다. 이는 물론 중국의 남조문화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지만 외래기술을 자기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백제인들의 장인정신과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백제의 건축기법은 중국과 달리 복잡하거나, 화려함을 극히 배제하였음을 유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고구려나 신라, 특히 중국에도 없는 독특한 건축술이 발휘되기도 했고 복잡한 기법을 단순화하였으며, 나아가 백제 특유의 양식과 기법으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특히 일본서기에 백제의 기술자가 왜에 들어가 비조사를 건립하고, 신라 황룡사9층탑을 백제 기술자가 건립했다는 역사 기록은 이러한 백제의 건축이 양식과 기술적으로 발전되어 있고, 체계화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필자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