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건국 세력이 고구려계 이주민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백제 초기 한성시대의 핵심지역이라고 인식되고 있는 서울 강남 일대의 고구려식 적석총을 통해 입증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의 건국시기에 대한 문제는 다양한 견해 속에서 『삼국사기』의 기록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데 고고학 자료로 본다면 늦어도 3세기 중반부터 고구려식 적석총의 영향 아래 토착 묘제에서 변화된 새로운 묘제들이 등장하는 것은 늦어도 그 시기부터는 적석총을 쓰는 사람들이 토광묘를 쓰는 사람들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고구려계 이주민들이 늦어도 3세기 중엽에는 석촌동 1호분을 비롯한 대규모의 적석총을 축조하고 비슷한 시기에 몽촌토성과 같은 대규모 성곽이 축조되었다는 사실은 늦어도 그 시기부터는 본격적인 고대국가로 출발하였음을 암시해 준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한 한강유역에서 이 시기에 이와같은 큰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원삼국시대 동안 한강유역이 서북한 지역의 목곽묘․전축분 세력권과 남부 지역의 토광묘․옹관묘 세력권 사이에서 일종의 완충지대로 남아 있다가 기원 2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주변의 여건이 변화되면서 토광묘 집단이 이주해 들어오고 이어 적석총 집단이 이주해 올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서울 일원에 정착한 이 두 상이한 집단은 상호 견제와 대립 속에서 점차 적석총 집단이 강남을 중심으로 한 토광묘 집단을 제압하고 주도권을 장악한 다음 풍납동토성과 몽촌토성, 대규모 적석총이 시사하는 바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었다고 판단된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토광묘 세력은 계층 분화가 심해지면서 일부는 최고 지배세력으로 편입되었다고 보여지는데 비교적 이른 시기의 대형 적석총에 해당하는 석촌동 1호분 북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토착계 왕비가 그 주인공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는 점에서 초기 단계에서부터 고구려계 지배자들은 토착계에서 왕비를 취할 만큼 기존의 토착 세력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