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의 南侵에 의하여 百濟의 文周는 熊津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文周의 웅진천도 과정은 상당히 위급하였으며 불의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熊津에 새로운 熊津城을 축조하여 천도하였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熊津은 천연적인 요새지였기 때문에 천도 이전에도 산성이 이미 위치하였던 것 같다. 이의 기존의 산성을 중심으로 천도하였으며 그 후 文周王·三斤王代에는 계속되는 내정의 불안으로 기존의 산성에 대한 도성 규모로의 수개축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東城王代에 이르러 변방에 본격적인 축성작업이 이루어지기 전 熊津城에 대한 대대적인 수개축이 이루어졌던 듯하다. 그러나 이 시기의 《三國史記》내용의 불충분으로 그의 내용 또한 전하여지지 않은 것 같다.
百濟時代의 熊津城은 지형에 따라서 土築과 石築을 병행하였으나 대체적인 축조법은 土築에 의존한 土城이었으며 그의 형태는 둘레가 2,660m에 이르는 포곡식의 산성이었다. 현재의 石城과 土城으로 이루어져 있는 성벽은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二重城으로 파악되기 보다는 서로 시기를 달리하는 성벽으로 파악하였다. 熊津城에는 수차의 수개축으로 인하여 당시의 부대시설을 파악하기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형에 의하면 東西南北에 4개의 문지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며 수구지가 1개소 설치되어 있었다. 성의 내부에서는 百濟時代의 건물지들이 주로 3개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쌍수정 부근에서 가장 밀집되어 분포되고 있으며 이 곳에서 발견된 유적의 규모와 출토유물에 의하여 이 일대가 웅진도읍기의 王宮址로 추정된다.
한편 熊津에 존재하였다고 하는 熊津羅城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熊津羅城內에 실시되었다고 하는 都城制중 部制또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羅城이 축조되고 都城內部制가 실시되는 것은 泗沘都城에서 부터인 것이다. 그러므로 熊津都邑期 百濟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熊津城은 羅城이 축조되고 部制의 都城制가 실시되었던 能津都城으로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熊津城內에 王宮이 위치하면서 熊津城內에 臨流閣과 池등을 두어 王宮의 부수시설을 두고, 熊津城밖의 주위에 건물들이 배치된 형태의 熊津城으로 파악된다. 熊津은 지형이 대단히 협소할 뿐만 아니라 금강이 범람하면 熊津을 南北으로 관통하고 있는 제민천을 따라 시내의 대부분이 침수되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百濟가 熊津에서 泗沘로 천도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熊津城의 방비는 가장 커다란 중대사였다. 웅진성을 방비하기 위하여 밖으로부터 웅진에 진입할 수 있는 통로의 요소요소에 많은 산성을 축조하여 대비하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