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리유적의 사역중심부는 백제말에서 통일신라말경까지 경영되었던 것으로 보여준다. 다만 이들 유적과 유물들은 동일 성격의 유적이 연속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본고에서는 여러 성격의 유적과 유물을 검토함으로써 유적의 상한과 하한, 가능 하다면 유적의 성격에 접근해 보고자 하였다.
검토 결과 왕궁리유적은 사찰이 들어서기 이전에 두, 세 시기의 유적 흥망이 이루어 졌다. 그러나 사찰이 들어서는 시기는 금당지나 강당지의 하부 축기부인 판축층에서 출토된 백제계 토기편과 기와편들이 왕궁리유적에서 출토된 가장 이른 시기의 토기편 및 기와편과 거의 비슷한 시기로 판단되었다. 이는 왕궁리 유적출토 유물들이 미륵사지나 보덕성, 저토성 등 주변의 백제 유적들과 상한을 함께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선행되는 유적은 석탑을 중심으로 배치된 몇 개소의 건물지군과 석탑의 북편 및 남측에 구축된 동서향의 석축을 들 수 있다. 이들 유적들에서는 유물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두 번째 시기나 더 늦은 시기에 조성된 유구에서는 토기편이나 기와편 등의 유물편들이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수막새, 토기편, 인장와, 평기와편 등이다. 또한 중국 백자편과 청자편이 출토되어 이 유적의 위상이 백제 왕실이나 국가최고 관부와 관련된 기관이거나 이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하게 하였다. 성벽의 경우 아직 조성시기와 성쇠시기는 조사해야할 여지가 남아 있다. 다만 성벽 내측의 성토층에서 출토된 선문타날 토기편과 기와편은 조성시기가 왕궁리유적의 가장 선행유적보다 한 단계 늦은 시기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동성벽의 사각형석재의 직상층에 남아 있는 성벽면 중에는 한 단을 안으로 물려 쌓았는데 이를 고구려의 서벽과 직접적으로 관련시키기에는 성급한 단계지만 당시 이 축성자가 이러한 구조를 알고 있거나 일견하였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부석시설의 경우도 고구려의 경우 성벽보호를 위한 것으로 이해되는데 이는 왕궁리유적의 성벽과 유사한 기능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왕궁리유적의 성벽이 정확하게 어느 시기에 포함된 유적이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속단할 수 없지만, 성벽내부 구조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이곳 금마에 고구려인 ‘牟岑’大兄을 거주케 하였다는 기록을 서두로 하여 670~684년에 걸쳐 무려 일곱군데나 나타나고 있다. 왕궁리 성벽이 안승의 보덕국관련 왕성이라는 단서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조사된 유적의 시기적인 점들을 검토하면 개연성의 가능성을 말해준다고 여겨진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