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무왕대에 이루어진 익산지역에 대한 천도설이나 별도설, 경영설 등은 주로 무왕의 권력강화라는 측면에서의 설명으로 일관되어 왔다. 그러나 익산지역은 청동기시대 이래로 마한, 백제, 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막론하고 군사적 요충지였던 곳이다. 익산지역은 지리적으로 전라도지역에서 북상하기 위하여 또는 차령과 금강의 북쪽에서 전라도 지역으로 남하하기 위하여 반드시 지나야 하는 군사적인 최대의 요충지였다. 그런데 무왕대에는 물론 약화된 왕권의 강화도 중요했지만 그것보다 더욱 시급했던 것이 바로 신라에 의한 한강유역의 상실 그리고 가야지역 상실에서 오는 위기감의 극복이었던 것이다. 이는 무왕 초기에 4만의 대병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고 있음을 보면 내부적인 당시의 왕권강화는 신라에 의한 고립으로부터의 탈출보다 시급한 것이 아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무왕 3년에 전라도의 운봉지역에서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지만 이 전투에서 패하자 무왕의 집념은 더욱 강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가야지역으로의 진출을 위하여 또는 만약 신라의 공격의 있을 시에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군사적 요충지인 익산지역을 중요시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불력으로 신라를 제압하려 하는 한편 승려들을 승군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요인에서 미륵사를 이곳에 창건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왕은 이곳의 행차시에 머무를 이궁을 건설하고 군대의 상주를 위하여 산성들을 축조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무왕의 일련의 행동들이 바로 무왕의 익산경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기존의 무왕의 익산경영의 이유를 왕권의 강화라는 목적으로만 해석하여 왔음에 대하여 당시 최대의 현안이었던 가야지역을 두고 각축을 벌이고 있던 신라와의 국운을 건 전쟁관계에서 군사적인 요새였기 때문에 익산의 경영이 이루어졌다고 이해하고자 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