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유역은 확실히 다양한 문화요소가 복합적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문화요소의 다양성과 복합성은 다른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바로서,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개방적 성격을 반영한다. 이러한 다양한 문화요소를 시기적 편년에 따라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따라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성격 규명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럴 때 역시 정리의 중심은 옹관고분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최근 옹관고분의 편년체계에 따르면 3세기대에 대두하여 6세기 전반까지 발전적으로 지속해 간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 기간 동안은 옹관고분을 지표로 하는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우선 상정하고, 그의 성립․전개․소멸의 과정을 따져보는 것이 순리이다. 그리고 여타의 문화요소들을 통해서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와 백제․왜․가야․중국 등과의 관계를 각각 따져보는 것 역시 필요하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연구는 단순히 백제가 영역화시킨 대상으로서만 보았는가 하면, 마한문화의 일부로 속단하기도 하고, 왜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고 보기도 하였다.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있는 그대로 보려 하기 보다는 외부세력 혹은 외부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만 상대적으로 규정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지칭하는 이름도 다양하였다. 독자성을 부인하는 입장에서는 ‘백제’의 일개 지방으로 파악하였는가 하면, 그 독자성을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마한’, ‘모한’ 혹은 ‘왜’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 시점에서 필자는 이러한 논의가 한국 고대사 속에서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위치를 구체화시키는 일에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생각에서 필자는 옹관고분을 지표로 하는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옹관고분사회’라 칭한바 있다. 이에 대한 학계의 비평을 기대하며,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해명함에 있어, 백제와의 관계 뿐 아니라 가야․왜, 그리고 중국과의 관계를 추구해갈 것과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마한’이라는 등식의 타당성 여부를 따져보기 위해, 마한 문제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검토해가기를 촉구하고 싶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