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여지승람에 기술된 동양최대의 석탑이라함은 당시 중국에서도 자은사 칠층석탑과 8세기 전반에 세워진 하북성의 운거사 칠층 및 구층석탑으로 보아 칠층이상의 조영으로 보여진다. 조선 영·정조 시기에 강후진의 와유록을 통해 이때 칠층석탑이 밭과 들 사이에 있는데 벼락을 맞아 그 반이 무너져 농부가 무너진 쪽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반파된 후에 기술로서 당시 정상부위가 이미 무너졌을 가능성이 있다. 물증의 증거로 옥개석의 낙수면 내밀기의 체감이 각층 옥개총폭과 같읻 당연히 있는 것이고 이에 따라 칠층으로 생각할 때 박영배씨의 안으로 보면 칠층 옥개석 낙수면 내민폭이 2m이상 되어야 하는데 (1.4m로 설계하였으나 이때 노반의 폭은 1.35m로 보아 실제 노출된 것보다 약 45cm가 더 크므로 차이가 있음) 이러한 옥개석은 현장에서 하나도 볼 수 없었고 폭이 85cm 되는 것이 발견되었다.
우리나라 석탑의 정상 옥개석이 4개로 이루어지는 것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나 감은사지 삼층석탑, 익산왕궁리 오측석탑 등 초기적 석탑형식에서 볼 수 있고 미륵사 오층석탑에서도 같았을 것으로 추정되어 전기 구층옥개석으로 추정되는 석재를 뒷받침하여 확인해준다.
우리나라 석탑은 옥개석이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대체로 일정 수촌으로 체감되면서 층고도 체감되어 상하층의 옥개처마 연결법면선의 기울기에 따라 약간씩 눈에 나타나지 않게 달라져 결국 위로 올라가면서 안으로 기울어지는 엔타시스를 갖는 체감을 한다. 특히 상층부에서 그 꺾임이 더 심해짐을 알 수 있고 이는 중국의 전탑에서도 고층일수록 잘 나타난다. 미륵사 석탑에서도 이와같은 옥개석을 추정하여 분류할 수 있으므로 결국 미륵사 석탑은 9층으로 추정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