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미륵사지와 황룡사지를 비교 고찰한 것이다. 미륵사지와 황룡사지는 미륵사상을 기반으로 세워진 것으로 미륵사상은 西牙의 메시아사상 즉 구세주 사상과 통한다고 할 수 있고 미륵불이 국가를 위시하여 중생을 구제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유행한 신라의 화랑이 미륵과 관계됨은 기록에서 볼 수 있으며 신라는 화엄의 발원으로 황룡사 9층탑을 세워 삼국통일을 성취하였다.
미륵사지와 황룡사지의 가람은 다같이 국왕이 세운 두 나라의 가장 큰 규모의 거찰이며 그 규모가 거의 비슷하고 동서 대 남북 평면 비의 계획이 같다. 두 사찰의 조영을 위하여 두 나라의 기술자들이 서로 교류하여 참여하였다. 미륵사의 가람은 삼금당 삼탑식 혹은 삼원병렬식인데 비해 황룡사는 삼금당 일탑식 가람이다. 가람의 규모를 결정하는 기준척으로 미륵사지는 중원 중문과 금당지간 거리 176척을 일변으로 하는 정방형을 기반으로 형성했고 또 탑의 상층기단의 대각선장과 관계되고 있다. 한편 황룡사지는 목탑지 상층 기단 일변장을 기준으로 가람 규모를 형성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미륵사지에서와 같이 섬세한 기하학적 균제를 이루지 못했다.
금당지의 규모는 황룡사가 미륵사보다 비교적 컸고 장방형의 긴 건물을 보였으나 미륵사지의 금당지는 정, 측면비가 √ 2 비에 가까웠다. 황룡사에서 탑의 높이와 기단의 크기와의 관계를 보면 주간 전장의 2 √ 2배는 탑의 상륜하고와 가까웠고 기단의 2√ 2는 탑의 전고와 거의 같다.
이상의 특성을 통해 미륵사와 황룡사의 조형계획은 유사한 점이 많아 이것이 백제의 건축기술에 영향 받은 것으로 생각되고 또 미륵사지의 평면계획이 황룡사의 그것보다 훨씬 선진적인 것으로 미루어 황룡사구층탑을 세운 아비지가 미륵사창건에 관여했던 사람이란 설을 더욱 뒷받침해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