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遺跡槪要
Ⅱ. 각 建物址에 대한 조사내용
Ⅲ. 5층석탑(國寶 第9號)
Ⅳ. 石佛坐像(寶物 第108號)
Ⅴ. 출토유물
Ⅵ. 伽藍配置에 대한 問題
Ⅶ. 建物의 平面計劃과 基壇의 構造
Ⅷ. 5층석탑의 건립년대
Ⅸ. 정림사의 변천
요약
정림사지는 부여의 중심지인 동남리에 위치한 백제시대 대표적 유적으로 몇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건물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정림사지는 1탑1금당식의 가람배치를 이루고 있다. 즉, 남에서부터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의 순서로 일직선상에 세워졌으며 그 주위를 회랑으로 둘러싸 외부로부터 차단하였다.
정림사지 5층석탑은 현존한 백제시대 석탑으로 희귀한 작품일 뿐 아니라 원형 그대로 유지한 점에서 학술적으로 더할 것 없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강당지 중앙에 자리한 고려시대 석불인 석불좌상은 보물 제 108호로 지정되었다. 석불은 결가부좌하고 있는 좌상인데 마멸이 심하고 파손된 부분이 많아 그 형체만 남아있을 뿐 세부적인 조각수법은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상태다. 오른팔과 왼쪽 무릎 등은 완전히 없어졌고 지금 불신 위에 얹혀진 얼굴과 갓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금당지 서북쪽에서는 골석제삼존불 1점이 출토되었고 회랑 안쪽 기와구덩이 속에서 도용파편 63점과 소조불 6점이 출토되었다. 또한 백제 및 고려시대 암수키와를 비롯하여 수막새, 암막새, 서까래기와, 인각명기와, 치미편 등 다양한 와전류가 출토되어 사원의 창건시기와 중건시기를 밝히는데 주요 자료가 되고 있다. 토기 역시 다양한 종류가 발견되었다. 정림사가 백제창건 사찰이며 현재 경내에 잔존한 5층석탑을 비롯하여 1~2차의 발굴을 통하여 밝혀진 바 있는 금당지의 특수한 2층기단과 석탑기초의 판축토층, 그리고 다량으로 출토된 와당 및 토기가 백제문화의 소산이다. 백제사찰의 창건 당시의 명칭은 기록에서도 알 수 없다. 사찰명은 재건시 사용된 평와 가운데 대평8년 정림사라는 문자가 새겨진 것이 발견되어 정림사가 명명하였다.
백제 멸망 후 1028년 재건까지는 360여년의 세월이 흐르며 이 동안의 정림사 역사는 모호하다. 창건가람이 화재를 입은 사실은 금당지 기단과 강당지에서 발견된 소토면에 의해 확실하다. 회랑 서남쪽의 대규모 기와구덩이에서 막대한 양의 와편들과 붉은 소토, 숯부스러기는 당시 화재로 인한 비참함이 얼마나 컸는지 가리킨다.
정림사의 창건가람은 사비성의 함락과 그 운명을 같이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다. 경내에서 발견된 기와구덩이에서는 백제시대 외의 유물은 하나도 섞여있지 않아 그 재난의 시기를 명백히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후 고려 초에 재건된 정림사 변천에 대해서도 그 종말을 더듬어 볼 실마리를 얻지 못하였고 조선 대표적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에서도 5층석탑에 대해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