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리가마는 1991년 7월 당진읍 구룡리 142번지에 거주하는 김의호씨가 집의 정원에 못을 만들기 위한 작업중 녹유병 등 10점의 유물을 발견 수습하여 신고함으로써 알려지게 되었다.
요지는 김의호씨 댁내 마당에 연못을 만들던 중 발견되었다. 구룡리요지가 위치한 김의호씨댁 주변 도동마을 일대를 지표조사하였으나 유구가 마을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주변에서 요지라고 추정되는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마을이 형성되면서 요지가 파괴되었거나 매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도동마을 일대에 요지가 발견될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된다.
구룡리요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김의호씨가 신고한 유물 10점과 현장에서 수습한 12점으로 모두 22점이며 녹유기와 토기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녹유기는 유색이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녹색, 녹갈색을 띠며 상태가 양호하다. 태토는 세사립이 약간 함유된 정선된 점토를 사용하였으며 소성도가 높지 않은 연질이다. 토기는 대체로 회흑색, 황갈색, 적갈색을 띠며 연질로 소성되었다. 태토는 가는 사립이 약간 함유된 정선된 점토이며 내면에는 녹로흔이 선명하다. 녹유가 시유되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녹유기와 태토, 질 등이 동일하며 초벌구이인 것도 있다.
요지는 파괴 상태가 심하여 아궁이와 요상과의 연결관계, 아궁이의 구조 등 전체 구조를 파악할 수 없지만 녹유기를 생산한 요지이며 삼국시대 회청색 경질토기와 통일신라 전기양식의 인화문토기 등의 출토를 통해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에 걸쳐 사용된 요지로 추정된다.
녹유기는 부여, 익산지역에서 6세기말~7세기초 기대 등에 채용되어 7세기대 성행하다 7세기말 이후 보이지 않으며 경주지역에서는 7세기 말에 골호, 와, 전에 채용되어 8세기~9세기대 성행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신라가 백제 멸망시킨 후 부여, 익산지역의 공인을 데려와 번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녹유는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되는 건축물의 자재와 기대, 골호 등 특수한 경우에 한정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는 시유의 사용을 국가에서 통제하던 품목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시유기를 생산하였던 요지가 광주 등 당시 중요 거점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당진지역에서 발견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