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II. 유구에 대한 검토
III. 비교ㆍ분석
1. 입지조건에 대한 검토
2. 축조방법 및 매장주체시설에 대한 검토
3. 주인공에 대한 검토
IV. 맺음말
요약
橫穴式石室墳 나아가서 백제 고분문화의 흐름에 대한 전반적인 수정을 요구하는 주장들이 잇달아 제기되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宋山里 積石遺構에 대한 재검토를 시도해 보았다. 그 결과 입지조건과 축조방법, 매장주체시설의 구조 등의 면에서 주변 지역의 積石塚과는 물론이고, 같은 백제시대에 축조된 漢江流域의 여러 유적들과도 많은 차이점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이러한 차이는 단순한 지역적인 차이가 아니라 근본 성격이 서로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이 유구는 어떤 성격의 것일까. 이에 대해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할 만한 자료는 없다. 다만, 약간의 논리 비약을 인정한다면 이것이 혹시 祭祀遺蹟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러나 이것은 住居나 墳墓유적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제시하는 것이며, 산의 정상부라는 위치와 『三國史記』 「百濟本紀」東城王 11년조에 보이는 “冬十月 王設壇祭天地”라는 기록을 고려해 본 것일 뿐 어떤 구체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기록에서 말하는 “壇”의 성격과 위치가 밝혀진다면 이 문제를 다시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積石遺構의 성격을 명확히 밝힐 수는 없다고 해도 이것이 한강유역에서 보이는 백제식의 적석총이라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새롭게 제기된 백제 橫穴式石室墳의 기원과 전개에 대한 최근의 주장들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한발 양보하여 이것이 적석총이라 하더라도 蓋鹵王의 무덤이라는 적극적인 증거가 없는 한 현재의 학계의 일반적인 분위기처럼 백제의 횡혈식 석실분이 웅진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든가, 혹은 횡혈식 석실분을 公州의 지방세력이 먼저 수용하였다든가 하는 주장들은 성립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적석총이 단 1기만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칼로 두부 자르듯 할 수 없는 일반적인 고분문화의 흐름상 오히려 훨씬 이전에 백제사회에 횡혈식 석실분이 소개되었음을 역설적으로 반영해주는 것이다. 고구려의 예만 보더라도 횡혈식 석실분이 3세기 중엽 경에 등장하지만 적석총은 오히려 5세기까지 이어지면서 크게 발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한강유역에 있는 횡혈식 석실분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다시 밝혀질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