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熊津時代의 百濟佛敎遺蹟
III. 傳 水源寺址의 實體
IV. 水源寺와 水源寺址
V. 맺음말
요약
백제가 웅진에 도읍하던 시기의 사찰은 문헌에 전하는 대통사나 수원사, 그리고 흥륜사 및 옹산, 여기에 수원사와 관련하여 추정할 수 있는 천산을 꼽을 수 있다.
수원사지의 경우 조사결과 유적의 잔존현황이나 출토 유물 등으로 미루어 초창의 시기가 아무리 빨라도 통일신라시대 말기, 혹은 고려시대 초기를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사지는 통일신라시대 말기나 혹은 고려시대 초기에 초창되어 이후 고려시대의 전 기간과 조선초까지 그 기능이 유지되었다가 조선시대 중기에는 폐사된 것임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백제의 수원사는 『삼국유사』의 수원사 관련 기사에서 웅천이 지금의 공주가 정확하다면 수원사는 공주에 있어야 한다. 더불어 眞慈가 친견하고자 한 미륵선화의 내용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한다면 수원사라는 사찰은 백제에 존재했었다고 보아야 한다. 더불어 그것이 백제의 가람이라면 이는 평지에 정연한 일탑일금당의 가람구조를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존 수원사지는 산지가람으로 백제시대와는 무관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기왕에 백제사찰로 본 유적 중에 대통사 등의 일부를 제외한 서혈사지나 주미사지, 그리고 남혈사지, 그리고 동혈사지는 초창시기를 아무리 빨리 잡아도 통일신라 말기로 볼 수밖에 없고 나아가 이들은 모두 산지가람의 형태로 수원사지와 비슷한 정황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황은 아마도 통일신라 말기 즈음에 평지가람이 산지가람으로 변화가 크게 일어난 것이 아닌가 추정되면서 백제시대부터 평지가람으로 존재하던 수원사는 통일신라 말기 즈음에 산지가람으로의 변화 즉 移建된 것이 아닌가 추정하여 보았다. 더불어 본래의 백제시대 수원사는 아마도 금학동 사지, 즉 고식의 기와가 수습되며 석불광배라던가 금동불이 수습된 지역으로 봄이 어떨까도 추정하였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