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유역 특히 지금의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고고학 편년체계를 주거유적 중심으로 재검토한 결과는 필자의 기존안과 다르지 않다. 풍납토성의 축조 시점 비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심발형토기는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로 보는 한 결코 기원후 200년경을 상회할 수 없으며 구체적으로 대경호와의 공반관계를 감안할 때 3세기 제2/4분기 경으로 추정한다.
풍납토성의 축조 상한 연대는 성벽절개지점의 축토층 혼입토기 가운데 심발형 토기와 장란형토기, 대옹 등이 있는 점으로 보아 3세기 중후엽이 된다. 몽촌토성의 축조 시점은 현재의 자료로써는 그 하한 연대만을 알 수 있는데 성벽 축조후 내측 퇴적토에서 출토된 전문도기로 보아 4세기 초엽이 된다. 그러나 문헌사료에 나타나는 정황을 고려할 때 몽촌토성은 3세기 4/4분기경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은 한성기 백제의 도성을 구성하는 2개의 성으로서 공존하고 있었음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21년조 및 일본서기 웅략기 20년조 등의 기사내용으로 미루어 잘 알 수 있는데 475년 당시 풍납토성은 북성, 또는 대성으로 몽촌토성은 남성, 혹은 왕성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규모나 지금까지 밝혀진 축조시점으로 보아 몽촌토성이 3세기 4/4분기에 먼저 축성된 후 이어서 어느 무렵엔가 풍납토성이 만들어 졌을 것으로 보이며 이후 규모가 작은 몽촌토성은 유사시 왕의 행궁 또는 별궁이 있는 성으로 기능이 변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성기의 왕성이 어디인가를 둘러싼 논란은 의미가 없다고 여겨진다. 즉, 한성기 도성제는 적어도 3세기 4/4분기 이후 어느 무렵에 평상시 왕궁이 소재한 풍납토성과 유사시 행궁이나 별궁이 소재한 몽촌토성 등의 2개의 단위성과 그 주변의 취락들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