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고려시대까지 그동안 발굴조사된 고고학적 자료를 중심으로 가구기단에 대해 검토하였다. 그 결과 시대적 변천에 따라 기단을 이루는 지대석, 면석, 갑석 등이 다양하게 변화해감을 살필 수 있었다. 특히 면석의 겅우 통일신라 및 고려시대에 걸쳐 우주가 모각되거나 첨가되며 지대석에 나타나는 우석의 존재도 백제시대와 백제 고토에 창건된 성주에만 시설됨을 볼 수 있다. 이런 특징은 지역적 특성뿐 아니라 그 축조술의 전파와도 깊은 관련이 있어 기단을 조성한 조사공들의 연관성도 주목할만 하다. 예컨대 이런 기단 축조술의 전파는 백제 금강사지와 일본 비조시대 비조사 중금당, 일본서기 558년 백제 조사공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최초 가람인 비조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느 계통의 조사공들이 일본으로 전파되었는지는 연구되지 않았다. 그러나 현존 기단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금강사지 가구기단과 비조사 중금당 가구기단이 부재와 축조기법면에서 아주 유사함을 살필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 비조사 창건에 투여된 太良末太, 文賈吉子와 같은 백제의 조사공은 금강사지 창건한 조사공과 그 출신이 무관치 않음을 판단해 볼 수 있다. 물론 당시 백제의 가구기단 축조술이 동일할 수도 있지만 금강사지 창건시기와 큰 시기차가 나지 않는 능사 목탑지를 비교할 때 우석의 존재면에서 분명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가구기단을 조영하는 부재의 치석 기법이 조사공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달랐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동일 시기에 와박사들의 와범에 따라 와당의 세부형태가 다른 것처럼 기단 세부형태도 조사공 계파마다 달랐던 것으로 이해된다. 아울러 미륵사지 가구기단과 법륭사의 가구기단이 축조기법면에서 유사한 것으로 보아 백제 조사공이 7세기 초반에도 전파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물론 그 조영기술만 전파되었을 수 있지만 당시 일본 조사공은 기단을 축조할 정도의 기술력이 부족하였고 비조사 역시 601~609년까지 동서금당이 새로 조영되는 시점이기에 비조사 조공이 606년 창건된 법륭사 조영에 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는 문헌사료의 기록은 없지만 결과적으로 7세기 초반 백제 조사공 2차 파견을 의미하는 것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