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중국 남조 및 고구려와의 문화교섭, 혹은 자생적 문화발전에 의거 다양한 기단건축이 발생하게 되었다. 기단은 기단토의 지사시설로써 석재, 기와, 塼토석혼축, 전토혼축, 전석혼축 등 다양한 재료로 축조되어 왔다. 특히 백제는 고구려나 신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와적기단 등이 사용되어 건축문화의 우수성을 엿볼 수 있다. 기단은 그 동안의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토대로 하여 볼 때 건물의 위엄이나 장엄 혹은 장식성을 돋보이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요컨대 이중기단이나 가구기단 등은 사찰의 금당지나 탑지 등에 만 주로 시설되었다는 공통성이 있어 이 같은 판단을 가능케 한다. 아울러 폐기와를 주로 하여 축조한 와적기단의 경우는 기단의 기능성과 관련 없이 장식성을 추구하는 데 사용되어 왔다. 백제는 6세기 중반 이후 제와술과 기단 축조술을 신라에 전파하였다. 전자의 형적은 현재 신라 지역에서 검출되는 백제계의 원형돌기식 와당이나 인각와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고 후자는 황룡사지 최종가람의 이중기단이나 나정의 할석재 이중기단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황룡사 9층목탑과 관련하여 백제에서 파견된 造塔工阿非知는 신라에 백제의 造塔기술을 전수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백제에서 신라로의 건축기술 전파는 백제의 멸망과 더불어 더 한층 가속화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전거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통해서도 그 편린을 살필 수 있다. 삼국통일 후 신라에 등장한 새로운 기단축조술로는 수직횡렬식의 와적기단과 감은사지 등에서 확인되는 가구기단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6세기 중반 이후 백제에서 유행하였던 기단건축이라는 점에서 큰 이의가 없다. 최근 들어 백제 및 신라의 故土지역에서 간헐적이나마 寺址를 비롯한 건물유적 등이 발굴조사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고학과 건축학의 연계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유적의 올바른 해석에 고고학 이외로 건축학의 참여가 필요한 시점이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