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월평동유적 방어시설
1. 월평동유적 조사내용
2. 방어시설 조성기법의 검토
III. 월평동산성 축조기법
1. 월평동산성 조사내용
2. 성벽 축조기법의 검토
IV. 월평동산성 축조시기의 검토
V. 맺음말
요약
월평동유적의 방어시설 중 목책은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에서 목책①은 '方形掘壙圓柱木柵'이고, 목책②는 이중목책으로서 목책도니성으로 추정된다. 그 중에서 목책②는 청원 남성골 고구려유적에서 조사된 이중목책과 기법상 공통분모를 가지는 것이 많다. 하지만 이러한 목책의 조성방법은 그 당시 보편적인 목책조성방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목책②는 정상부의 동쪽 사면 등고선에 거의 평행하게 진행하므로 산성에 부속된 보루일 가능성이 높다. 월평동유적의 성벽①은 기본적으로 목책도니성 조성기법을 가지고 있으나 외벽의 재료로 할석을 사용하였다. 목책②와 마찬가지로 보루로 파악하였으며, 조성시기 또한 목책②와 그리 많은 차이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성벽②는 정상부를 거의 일직선으로 지나고 있다. 성벽의 폭이 1.2~1.4m 정도로 좁은 것으로 보아 통상적인 개념의 성벽이라기보다는 긴급한 상황에 처하여 임시방어선을 구축할 목적으로 쌓았으며 차단성일 가능성이 높다. 성벽 기초 및 석축 조성방법이 월평동산성 남벽과 동일하기 때문에 월평동산성 남벽 조성시기와 동일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월평동산성 성벽축조 이전 성토다짐층과 성 내부 쪽 구상유구는 방어시설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상면의 원지표면 출토 고구려토기를 고구려의 일시점유로 보지 않고 고구려계 주민의 거주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추론하였다. 원지표면의 연대는 성토다짐층보다 늦은 5 세기 말 이후 6세기 전반 무렵으로 보았다. 또 체성토루 기단부는 상하 2층으로 나누어지는 기단으로 보기 어려우며 하층토루와 상층토루의 조성기법이 다르므로 이를 구분하여야 할 것이다. 판축토루인 상층토루와 외벽석축 즉 '石築附加 版築城壁'은 사비천도 이후의 축성법으로 파악하였고 성벽의 최종 조성시기는 6세기 후반으로 추정하였다. 또 월평동산성은 약 700명 정도의 군사가 방어할 목적으로 쌓은 성이며, 계족산성과 그 주변지역에서 6세기 후반 경의 신라토기가 출토되는 것과 연계하여 백제 雨述郡 治所의 이동가능성과 아울러 월평동산성이 如斯只城이라고 하는 견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