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왕궁리유적 발굴 성과 검토
1. 발굴 경과
2. 유적의 조성 연대
Ⅲ. 궁성과 사찰
1. 궁성의 설계와 내부 공간 활용
2. 사찰의 규모와 성격
Ⅳ. 맺음말 : 왕궁성의 성격
요약
왕궁리유적 발굴성과를 중심으로 유적의 연대문제와 유구별 성격, 그리고 궁성 내부의 공간 활용문제를 살펴보았다. 왕궁성의 초축연대는 무왕대로 비정되며, 무왕의 익산지역 경영 정책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遷都나 別都를 확정할 만한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왕실에 공급했을 것으로 보이는 귀금속을 가공하던 공방지가 존재하는 점, 궁성 내부의 공간 구획을 계획적․의도적으로 한 점, 외곽의 성벽 형태와 구조로 보아 왕궁이나 이에 준하는 성으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또한 중국 남북조시대 고급 瓷器片, 五部의 명칭이 있는 인장와, ‘首府’명 인장와의 존재는 이곳이 당시의 왕성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왕궁성의 조영은 축조수법․공간 구획․건물배치 등으로 보아 일반 방어용의 성곽과는 달리 규칙적인 비율을 적용하여 설계했을 가능성이 크며, 조성된 평탄대지에는 구역별로 궁성내부의 기능과 관련한 건물배치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왕궁 및 관아의 계획적인 배치와 구획의 양상은 사비도성에서 일부 확인되고 있어 공통점을 보여준다.
2005년도 발굴조사에서는 왕궁탑 남편의 제1동서석축 앞에서 대형의 동서방향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이 건물지 주변으로도 다양한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어서 공간과건물지의 성격 등을 정밀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와 유사한 대형건물지가 부여 관북리 추정왕궁지에서도 확인되었으므로 양자를 비교 분석하면 왕궁성 내부의 공간 활용과 건물지의 성격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왕궁성의 평면형태는 중국 고대 도성구조와 유사성을 보여주며 당시 밀접한 교류관계에 있었던 중국 도성제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다.
사찰은 남북일직선상 탑, 금당, 강당을 배치하여 백제가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중심시기는 통일신라, 창건연대의 상한은 백제말로 올라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반출되는 명문와로 볼 때 삼국사기의 대관사에 비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된 바대로 639년 제석정사의 소실 후 다시 조성했던 사찰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조사 결과 현존 석탑 하부에 목탑추정 축기부가 존재하므로 창건가람이 탑은 목탑형태로 추정되고 있다. 이 사찰은 앞선 유적인 궁성의 중심부 건물군이 있는 위치에 이를 대체하면서 들어섰고, 탑과 금당 사이에 놓인 동서석축은 사찰이 들어서면서 그 기능을 잃고 매몰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