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백제의 초기 도읍 河南慰禮城
III. 漢城체제로의 변화
IV. 몽촌토성의 기능과 축조연대
V. 맺음말
요약
서울시 송파구에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석촌동고분군 등 백제초기의 중요유적이 밀집 분포한다. 그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풍납토성은 성벽의 둘레가 3.5km에 이르는 백제에서 가장 큰 평지토성이다. 내부에서 토성을 쌓기 전 초보적 방어시설인 세 겹의 환호가 발견되어 이곳이 백제의 출발지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즉, 3중 환호에서 살던 사람들이 집단규모가 커지자 더 큰 규모의 토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백제의 초기 王城인 위례성은 대략 4세기 무렵에 한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중국의 선진적인 제도․문화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지자, 그에 맞추어 정치구조를 개혁한 것인데, 단순히 왕성의 이름뿐만 아니라 왕성체제에서 도성체제로 바꾸었다는 뜻이다. 아직 泗沘城처럼 도시 전체를 羅城으로 둘러싸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도시 전체에 권위를 부여하는 도성체제가 성립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성의 구조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北城과 南城, 『일본서기』에는 大城과 王城으로 적혀 있다. 북성(대성)은 지금의 풍납토성, 남성(왕성)은 지금의 몽촌토성으로 추정된다.
몽촌토성은 종래 3세기 중․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편년의 중요한 근거는 엽전무늬도기다. 엽전무늬도기가 주로 西晉 때 제작・사용되었으므로 3세기 후반에 수입해 쓰다가 몽촌토성을 쌓을 때 일부 조각이 휩쓸려 들어갔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엽전무늬도기는 서진 때에만 만든 것이 아니었다. 양자강유역에서는 4세기의 東晉은 물론 5~6세기의 南北朝시대에도 널리 사용했다. 그러므로 엽전무늬도기를 기준으로 몽촌토성의 축성연대를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더욱이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것은 온전한 형태가 아니라 한 조각이었다. 중국에서 수입된 뒤 바로 묻힌 것이 아니라 한동안 쓰여지다 파손되고 나서 땅에 묻힌 것이다. 주변에서 나머지 조각을 찾지 못했으므로 성벽을 쌓기 위해 흙을 퍼오는 과정에 휩쓸려 들어간 것일 개연성이 있다. 그렇다면 엽전무늬도기는 몽촌토성 축성연대와는 직접적인 상관성이 없다.
근래 풍납토성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토기 출토량이 급증하면서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상대적으로 뒤늦은 시기에 제작․사용된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백제토기들은 대개 4~5세기에 제작․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몽촌토성에서 이른바 中島式土器로 불리는 경질무문토기가 지금까지 거의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이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한다. 발굴조사 성과가 늘어나면서 몽촌토성 출토 토기의 편년 하향조정이 요구되고 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