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능산리사지의 성격과 건립시기에 대한 제 논의와 문제점
III. 능산리사지 건물지 재검토
IV. 구태묘 건립과 묘사로의 변화
V. 맺음말
요약
扶餘陵山里寺址는 建物址의 배치와 건축 특징에 따라 講堂址, 不明建物址I·II, 工房址I·II로 구성된 1次建築群과 金堂址, 木塔址, 東·西·南(中門址포함)回廊址로 구성된 2次寺刹建築群으로 대별되었다. 특히 1次建築群은 高句麗 건축형태, 웅진기에 연속되는 출토유물, 6세기 전엽대로 집중되는 고구려계 유물 등에 의하여 泗沘遷都 직전까지 건립되어 천도 후 기능하였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2次建築群은 557년 무렵에 始建되어 567년 무렵 완성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1次建築群은 高句麗 東臺子遺蹟과 定陵寺址와 같은 구조인 바, 聖王이 백제 거주 高句麗住民(건축기술자)을 가담시켜 건립한 仇台廟로 特定되었다. 聖王은 천도와 함께 凡夫餘系住民들(특히 敵對關係에 있던 高句麗주민들)을 통합시키고자, 漢城期末이래 중단되었던 始祖仇台廟를 1차건축군으로 세우고, 南夫餘로의 國號改名을 天地와 始祖에게 천명함으로써 백제중흥의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이는 곧 聖王의 강력한 夫餘繼承意志의 體現이었다. 1次建築群의 건축구조와 출토유물이 高句麗系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한편 557년 즈음 威德王이 始祖仇台廟에 寺刹建築群을 附加하게 된다. 이는 父王이 건립하여 夫餘繼承意志가 담겨있는 仇台廟에 佛敎祭祀施設을 덧붙임으로써 비정상적으로 사망한 聖王의 원혼을 조상신에게 인도함과 동시에 父王의 夫餘繼承意志를 追尊해 주고자 한 것이었다. 이는 곧 威德王의 지극한 孝의 실천이기도 하였다. 이때 金堂에는 생전에 轉輪聖王으로서 王卽佛思想을 구현했던 聖王遺像(佛像)이 봉안되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全體建築群이 上→ 仇台廟,下→ 聖王追福佛寺의 형태로 仇台廟祭祀와 佛敎祭祀가 함께 이루어지는, 廟寺로 변하게 되었다. 1次建築群에서의 仇台廟祭祀는 威德王代까지 계속되었지만, 550년대 이후 高句麗, 新羅와의 연이은 대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仇台廟祭祀는 쇄락하고, 威德王중후반기에는 凡夫餘系의 실질적 始祖인 東明廟 祭祀로 환원된 것으로 이해된다. 2次寺刹建築群이 附加된 후에 1次建築群 중 工房址I·II와 不明建物址II는 이제 陵山里古墳群과 廟寺의 기능과 관련된 제의물품을 생산하는 工房址로 전화되었다. 이는 곧 仇台廟의 기능과 그 중요성이 크게 약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威德王자신이 2次寺刹建築群건립과 함께 종래 仇台廟로 기능하던 상당수의 건축물들을 祭儀物品製作工房址로 용도변경한 것이나, 『日本書紀』의 建邦之神기사가 이를 잘 말해 준다. 聖王의 夫餘繼承意志의 체현으로 泗沘遷都와 함께 부활되었던 仇台廟는 이제 凡夫餘系주민들의 의식 속에 그대로 살아 있는 元始祖東明을 대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2次寺刹建築이 들어서기 시작하는 560년대 즈음에는 始祖廟는 東明廟祭祀로 환원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