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백마강변에 조영되었던 백제 왕흥사 목탑은 사리함이 기록으로 보아 위덕왕대인 577년경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지는 사리함과 공양구가 놓인 공양석(지하)와 찰주가 올린 심초석(지상)이 상하 별도로 분리되어 조성되었다. 이러한 조성 사례는 기존에 발굴조사된 군수리사지나 능사지 목탑지의 심초석(공양석도 겸함)이 완전 지하에 매납된 상황과 비교해 볼 때 큰 차이가 아닐 수 없다. 아울러 7세기 이후에 조영된 제석사지 목탑지의 심초석이 완전 지상에 놓이는 것과도 구조적 차이가 있다.
이처럼 왕흥사지 목탑지에서 검출된 공양석과 심초석의 상하 분리 배치는 일찍이 동위~북제대에 조영된 조팽성사지에서 찾아볼 수 있어 이러한 축조기술이 위덕왕대에 북조에서 백제로 전파되었음을 판단케 한다. 이는 사리병 뚜껑에 시문된 重瓣의 瓣端尖形 연화문고 상평오수전(중국 화폐이름), 그리고 위덕왕대의 對북조기사를 통해서도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다. (필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