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 都城과 王都
II. 熊津王都의 구조와 특징
III. 대통사의 창건과 웅진왕도
1. 대통사의 창건
2. 대통사의 위치
IV. 맺음말
요약
웅진왕도는 한성과 달리 도읍지의 북쪽 끝에 왕성인 공산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성시대까지만 해도 북성과 남성으로 나뉘어져 있던 것이 단일 왕성체제가 되면서 그 위치도 북쪽에 자리하는 이른바 ‘北宮型’체제로 변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웅진왕도는 한성이나 사비도성과 달리 도읍지 한가운데를 남에서 북으로 제민천이라는 하천이 지나고 있다. 왕성인 공산성은 제민천 동쪽에 있는데 비해, 곰나루는 그 서쪽에 있었던 만큼 제민천을 건널 수 있는 교량은 필수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동성왕 20년(498)에 건설하였다는 웅진교는 이러한 제민천에 가설한 교량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왕도내에 성왕 때 대통사가 창건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대통사는 성왕 5년(527), 혹은 성왕 7년(529)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아울러 기록에는 백제 성왕이 양나라 무제를 위해 대통사를 창건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당시 성왕이 처했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해 볼 때 『삼국유사』의 이러한 설명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성왕 때 대통사가 창건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위치가 어디인지는 아직까지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일제 강점기때부터 ‘大通’명 인장와와 백제시대 와당이 반죽동 일대에서 찾아지고, 그 주변에 당간지주도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그 일대가 아닐까 하는 추정이 있어왔다. 실제로 그곳은 전통적으로 공주시대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봉황산 가까이라는 점에서 그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주변에 ‘대통교’라는 다리가 있는 것도 하나의 방증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대통교는 말 그대로 ‘대통사로 통하는 다리’, 혹은 ‘대통사 주변에 있는 다리’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위치나 대통사와의 관계를 고려해 볼 때 동성왕 때 가설하였다는 웅진교와의 관련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대통사는 이 대통교의 바로 서쪽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해 왔다. 그런데, 대통교와의 관계를 고려해 볼 때 종래에 생각해 왔던 것보다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지점, 즉 대통교에서 공주대 부속고등학교를 연결하는 동서도로의 북쪽에 대통사가 위치해 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래야 대통교를 건넌 다음, 대통사의 남문이나 중문을 통해 자연스럽게 대통사 안으로 진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론이 인정된다면 대통사는 웅진왕도의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었던 셈이 된다. 그런 점에서 부여의 정림사나 북위의 영녕사, 그리고 양나라의 동태사와 비교될 수 있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대통사가 아니었을까 한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