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2. 위치와 역사적 환경
3. 百濟寺跡에 대한 이전의 인식
4. 재정비에 따른 2005年 이후의 조사 개요
5. 맺음말을 대신하여
요약
이번의 조사에서는 寺院地内의 伽藍地 주변을 구성하는 地下遺構가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다는 점과 北面・西面築地大垣의 검출에 의해 寺院地의 四至가 약 140m로 확정되었고, 北門・西門의 존재 역시 확인되었다. 또한 東西面 両回廊의 북단에서 北面築地大垣을 향해 곧바로 뻗어있는 南北築地가 검출되어, 정연하게 구획된 付属院地가 존재하는 것이 밝혀졌다.
이들은 講堂・食堂의 僧地空間(僧院)과 西北院・東北院을 구획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西北院에서는 東西棟의 大型掘立柱建物, 東北院에서는 青銅製品鋳造遺構를 필두로 하는 冶金工房跡이 검출되어 해당 院地의 일각이 修理院에 해당된다는 점 역시 상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付属院地의 검출은 古代寺院의 구조와 경영의 실태를 밝히는 극히 중요한 성과로서 평가할 수 있다.
더욱이 8世紀 중엽은 氏寺造営이 규제되어 있던 시기로, 百済寺가 규모는 작지만 礎石・基壇化粧 등, 당시의 官寺에 보이는 最新技術을 구사해서 조영되었고, 더욱이 四面에 築地大垣을 두르고, 南大門・東門 외에 北門・西門도 갖추고 있으며 堂塔院을 감싸도는 付属院地 역시 築地塀에 의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어 京師의 그것과 비교해서도 손색이 없는 것으로, 百済王氏의 당시의 융성함을 재인식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이전 조사에서 존재가 추정되었던 講堂 양 옆에서 이어지는 翼廊 또는 軒廊은 확인되지 않았다. 伽藍의 創建時期나 伽藍遺構의 下層에서 검출된 大型掘立柱建物群의 시기와 성격을 상세하게 밝히지도 못하였다. 또한 百済王神社가 百済寺造営時에 付属施設로서 계획적으로 배치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발굴조사를 거치지 않아 상세하게 알 수 없는 등, 새로운 지식을 얻기는 하였지만 미해결의 부분이 많이 남아 있는데, 정비에 따른 최소한의 조사라는 점 때문에 새로운 지식에 더해 새로운 의문 역시 누적되었다.
百済寺跡 발굴조사의 출토유물은 1965年 조사의 미보고분을 포함해 유물상자로 약 3,000상자이다. 이들을 합쳐 보고서를 작성할 예정으로, 현 단계에서는 검토가 불충분하기 때문에 많은 부분을 이야기하기는 불가능하다. 출토유물의 절반이 屋瓦類로, 그 대부분이 파편이다. 軒丸瓦・軒平瓦(図ロ30・1)를 시작으로 丸瓦・平瓦・鬼瓦・隅木蓋瓦・鴟尾片, 방형 벽돌 등이 있다. 土器에는 須恵器・土師器・黒色土器 외에, 二彩・三彩 등의 軟質施釉陶器, 灰釉陶器, 青磁・白磁가 있다. 또한 중세의 瓦器椀・土師皿・瓦質羽釜의 파편 역시 적지 않다. 또한 大型多尊セン仏(図u32)을 포함해, セン仏(図&33)이 주목된다. 금속제품에는 鉄釘類와 소량의 青銅製建築金物나 金銅製飾金具 등(図ハ34)이 있으며, 그 외 특수한것으로 鞴羽口, 溶解炉片, 溶銅, 青銅滓, 鉄滓 등으로 이루어진 冶金関連遺物가 있는데, 이들 중에는 鋳型의 파편도 다량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되지만, 정리 중인 현단계에서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필자 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