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
Ⅱ. 公山城의 현황
1. 공산성과 관련된 기록
2. 조사현황
Ⅲ. 2011년 공산성 성안마을 백제유적
1. 遺構內容
2. 遺物內容
Ⅳ. 공산성의 역사문화환경-성안마을 발굴조사 성과
Ⅴ. 맺음말
요약
2011년의 발굴조사는 성안마을 내 백제유적에 대한 조사결과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직후 조영한 굴립주 건물지부터 백제멸망기 웅진성의 현황을 알 수 있는 대단위 화재 폐기층에 이르기까지의 단계적인 변화․발전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유적을 확인함으로써, 웅진성의 역사성을 한층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큰 성과를 얻게 되었다. 물론 제한된 범위에 대한 조사를 통하여 전체 유적현황을 파악하는 데는 많은 한계가 있다. 그러나 조사범위 외곽으로 넓게 유적의 분포가 확대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성안마을 내 유적의 범위는 전체 면적을 아우를 정도의 대규모로 판단된다.
특히 조사된 유적은 계곡부의 저지대를 활용하여 대지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대단위의 토목 사업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계획적인 건축구획을 통한 공간 활용이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이는 백제의 토목기술과 건축문화의 전개상을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이기도 하다. 더불어 옻칠 갑옷과 목기, 장식도 등의 출토유물을 통하여 매우 정교하고 고급스러운 백제의 공예기술을 살필 수 있다. 물론 고대 백제의 공예기술은 이미 백제금동대향로를 통해 입증된 바 있는데, 이번에 조사된 공산성 출토 유물을 통하여 백제의 갑주문화뿐만 아니라 수준 높은 칠공예의 면모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유적의 폐기상황은 고고학 자료에서 찾기 어려운 역사적 환경을 추론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유적 내 대단위의 화재로 폐허된 건물지와 불어 탄 화재흔적과 다수의 화살촉이 포함된 와적층을 통하여 대규모 전쟁의 흔적을 추론할 수 있다. 특히 저수시설에 숨겨놓듯이 폐기되어 있는 정관19년명(645년)의 화려한 옻칠 갑옷과 무기류 등을 통하여 1,400여 년 전 공산성에서 이루어진 급박한 역사적 정황으로,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인한 의자왕의 웅진성 피신과 항복사건을 주목하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전쟁관련 기록을 확인할 수 없으나, 2011년 성안마을 내에서 발굴 조사된 백제 유적의 잔존상황은 백제 멸망기 웅진성의 급박한 상황을 추론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이러한 검토에서 알 수 있듯이 2011년 공산성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공산성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백제의 웅진도읍기 성으로 이해하거나, 왕성으로 보는데 주저하는 견해도 많았다. 그러나 2011년 발굴조사를 통하여 공산성 내에서 백제가 웅진에 천도한 직후부터 멸망기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편년할 수 있는 유구가 구체적으로 발굴조사됨으로써, 공산성의 역사적 인식영역이 백제의 웅진천도 이후부터는 백제사 전반에 걸쳐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