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유역의 대형옹관묘 자료에 대한 검토를 바탕으로 옹관묘조영집단의 성격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영산강유역의 대형옹관묘는 현재 130기를 헤아리며 그 입지지형은 한강유역에 자리한 초기 백제고분처럼 평지나 구릉상에 위치한다. 그 안에 청동기, 철기 문화등 선행문화유적이 나타나 이미 선주집단이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성이 존재하는 등 이런 문화기반 위에 옹관묘가 이루어졌음을 살폈다.
축조와 조성방법은 봉분을 먼저 축성한 뒤 옹관을 그 정부에 매장하였으며 봉분의 형태는 원형, 방대형, 전방후원형 등 다양하였다. 그 규모는 동산처럼 거대하거나 소규모이며 거대 봉분의 피장자는 이 지역의 실질적 지배층으로 파악된다. 대형옹관묘는 나주군의 반남면과 다시면 복암리, 영암군의 시동면 일대, 함평군의 월야면 등에 20~30기씩 밀집분포하며 하나의 봉분 내에 여러 기의 옹관이 매장되어 가족공동묘적 성격을 띤다. 다른 지역의 옹관묘와 비교에서는 봉분의 유무, 옹관의 형태나 크기, 부장품, 피장자의 성격 및 연령, 타묘제와의 공존관계 등 근본적 차이를 보인다.
부장품은 배치상태와 각 고분에서 출토된 유무를 살펴 중요유물에 대해 알아 보았다. 각 고분 간에 차이가 있지만 금동관,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을 부장한 것도 있으며 철제대도, 도자 등 무기류가 많은 편이다. 부장품 가운데 장례용으로 특별히 제작된 것도 있었고 토기는 지역적 성격을 보여주며 제작기술을 일본에까지 전해주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영산강유역 대형옹관묘는 이 지역에서 성장하고 있던 마한제소국의 지배층에 의해 늦어도 4세기경 발생하였고 5세기경 크게 유행을 보았으나 5세기 후반부터 백제의 지방통치체제의 강화로 묘제자체에 대한 변화를 일으켜 옹관묘는 쇠퇴하고 석실분이 유입됨을 알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