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지역 옹관묘는 선사시대부터 말기까지 전지역에 걸쳐 다양하게 축조되어 한강 유역과 금강유역에서는 일시적이나 영산강유역에서는 계속 발전하여 사용됐다. 묘제상으로 보아 옹관 자체만 쓰인 경우는 이른 시기의 것이고 타 묘제에 부장된 경우는 역사시대에 들어온 시기의 것이다.
옹관이 초기에는 주로 어린이에게 사용되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성인의 신전장과 2차장에 사용되어진다. 부장유물의 내용으로 보아 대체적으로 일부서민층에 쓰여졌으나 부분적으로 지배층에도 쓰였다.
두침의 방향은 기존 묘제의 방향과 일치하는데 삼국이전에는 동침이, 삼국기에는 서침, 북침이 주류를 이룬다.
시체는 머리쪽을 약간 높게 매장하여 두고족저의 위치가 되도록 하였다. 한강유역과 영산강유역에서는 하나의 봉분 내에 여러 기의 관이 매장된 가족공동제묘적인 성격을 띤다. 금강유역에서는 육탈 후 취골하여 옹관에 넣는 2차장이 사용되었다.
한강유역과 영산강유역에서는 평지나 구릉의 정상부 편평한 곳에 위치하며 금강, 동진강유역에서는 구릉의 경사면에 산의 경사를 따라 위치하였다.
한강과 영산강 유역은 점토를 판축하여 봉토를 만들었고 옹관은 봉토 중에 안치되었다. 한강유역은 토광묘에 부장되었고 금강유역은 석실분에 부장되거나 인접한 곳에 석실분이 있으면 석곽 내에 안치된 것도 있다. 영산강유역에서는 옹관묘군 속에 토광묘가 부장되어 있다.
한강유역의 관은 소형의 일상용기를 금강유역은 호형의 일상용기, 동진강유역은 대형의 일상용기를 대용하였으며 영산강유역에서는 원통형의 대형옹관이 특별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금강유역의 옹관 중에는 관의 저부에 2차 천공이 있는 것도 있다.
토기에 시문된 문양은 격자문, 승문, 승대문, 격문의 혼합문 등이 사용되었고 거치문은 동진, 영산강유역의 옹관 편부에서만 보여진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