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석촌동 토광묘 출토 칠기의 성격과 연대문제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칠기와 중국 칠기와의 관계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1986년 발굴된 석촌동 토광묘에서 출토된 칠기류는 총 5점으로 이들은 목심부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다가 작은 파편으로 부셔져 완전한 복원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15개월 간의 정밀 작업을 통해 복원 및 보존처리를 끝냈다.
석촌동 토광묘에서 출토된 칠기류는 기종에 있어서 낙랑계 칠기류와 이어지지만 문양, 시문방법 등에 있어서는 낙랑 이후의 전통 칠기와 연결된다. 여기서 낙랑 이전의 전통칠기는 석촌동에서 의창 다호리, 함평 초포리를 거쳐 서기전 3세기 초의 아산 남성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인데 그것과 동시기의 중국 전국시대 칠기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하는 문제는 계속 추적해야할 것이다. 다만 본고에서는 종래 낙랑군 설치와 더불어 보급되었을 것으로 인식되었던 우리나라의 칠기가 그보다 앞선 시기, 늦어도 전국시대부터는 시작되어 맥을 이어오다가 낙랑 이후 기종, 문양 등이 첨가되어 고신라로 이어졌음을 지적할뿐이다.
그런데 4세기 이후에 신라고분에서만 칠기가 나타나는 것은 보다 자세한 분석이 뒷받침되어야 하나 일단 다음과 같은 이유로 추정된다. 중국의 칠기는 한 이후 육조시대로 들어오면서 자기의 증가와 함께 쇠퇴되었는데 육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백제에서는 원성군 법천리, 석촌동 고분군, 몽촌토성, 천원군 화성리, 무령왕릉 등지에서 출토된 자기류가 시사하는 바 중국과 동일한 맥락에서 칠기의 명맥이 끊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반면 육조와 깊은 교류가 없던 신라는 자기류의 사용이 활발하지 못하여 종래의 칠기제작이 지속되어 당대에 신라칠이라 하여 중국까지 수출되었고 고려시대 이후 오늘에 이르는 독보적 나전칠기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