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머리말
II. 檢討對象과 硏究小史
III. 古墳構造에 대한 檢討
IV. 葺石施設에 대한 檢討
V. 맺음말
요약
한강유역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고분은 크게 나누어 토묘와 석묘로 나누어왔다. 토묘에 속하는 토광묘 가운데는 지하에 광을 마련하지 않은 토장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들 토장은 지상의 분구 중에 마련하여 종래의 토광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구조를 나타내고 있어서 계통적으로도 크게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 토장을 포함하여 가락동 2호분, 석촌동 5호분 등과 같이 방대형분구에 즙석을 시설하고 분구중에 토장을 비롯하여 여러 매장시설과 다양한 장법에 의한 다장이 포함되어 있는 구조 형식을 지하에 광을 마련하는 토광묘와 구별하여 토축묘라는 새로운 용어로 표현하였다. 이 내부구조는 소재지의 지형, 즉 묘지가 물가에 자리한 점, 부장유물이 간루하여 특히 금은옥제 등의 장신구와 농기구, 공구 등이 없는 점 등과 아울러 중국의 양자강유역에만 특징적으로 존재하는 토돈묘와 같기 때문에 우선은 그 계통의 문화가 들어와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종래 한반도에서는 특히 압록강 또는 대동강유역, 금강유역지방에서는 나타난 바가 없기 때문에 더욱 황해를 건너온 문화라고 추측한다.
석묘에는 적석총, 석관묘 등이 있으나 그중 적석총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는 찾기 어려운 고구려지역의 묘제이기 때문에 백제의 건국과 더불어 주목되어 온 바이다. 석촌동에서 조사된 3호분, 4호분은 외형은 통구지방의 계단식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바로 고구려식의 재현쯤으로 생각하였으나 4호분 조사 결과, 점토를 판축기법으로 다지고 그 안에 토장을 3기정도 마련하였다. 토축묘와 적석총은 축조시기에 있어서 크게 차이가 있기도 하다. 토축묘는 2~3세기까지 올려볼 수 있는데 비해 계단식 적석총은 4세기대 이전으로는 올라가지 못한다는 것이 학계의 연대관이다.
이와 관련하여 문호리, 중도 등지에서 발견조사된 적석총들도 고구려식의 적석총과 비교하면 크게 상이하다. 적석이란 것은 즙석정도로 얇게 덮여있고 기단부는 말할 것도 없고 분구의 중간부위까지도 모래 등으로 축조되었으며 묘곽시설도 판이하다. 역시 이들 적석총도 토축묘에 적석총이 가미된 구조로 보았다. 위치나 분구규모가 원래 토묘계보다 크고 정형화되지 않은 점 등에서 오히려 서울지역 토축묘보다는 양자강 유역의 토돈묘와 더 닮았다. (연구원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