扶餘地域의 百濟古墳은 土壙墓, 甕棺墓, 石築墓, 火葬墓等으로 분류할 수 있다. 平地形土壙墓는 土壙의 築造를 地上의 封土內에 한 반면 山地形은 地下에 土壙을 두었는데 扶餘地域의 素沙里, 豆谷里等地의 土壙墓는 모두 地下式에 해당된다. 葬法은 單葬과 多葬으로 구분되는데 上記한 扶餘의 土墳墓는 單葬이 主가 되는 듯하다. 素沙里土壙墓는 4세기 後半頃에 造營된 것이다. 新里土壙墓는 金銅製環과 鐵製刀子가 출토된 점 등으로 미루어 被葬者의 身分이 상위계층이었을 것이며 築造時期도 扶餘都邑 이전으로 올려보아야 될 것 같다. 豆谷里土壙墓는 木棺을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墓壙의 構造는 素沙里와 新里의 土壙墓들과 같은 형식으로 이해된다.
扶餘地域의 甕棺墓는 陵山里와 鹽倉里에서 2基만이 調査되었는데 單甕에 單葬의 形式이다. 築造時期도 石室墳과 같은 6세기 末頃으로 추정된다. 石築墳은 横穴式石室墳이 주류를 이루는데 竪穴式石槨墳의 경우는 調査된 例가 극히 부족하며 扶餘의 豆谷里에서 調{査된 石槨墳은 규모와 墓槨이 石槨形이라는 것만 확인되었다. 穴式石室墳 가운데 터널형 石室墳은 數例에 불과할 뿐이다. 陵山里2號墳은 터널형 石室墳으로 公州의 武寧王陵에 비하여 塼材를 石材로 바꾸었을 뿐 같은 형식의 構造와 築法을 보이고 있다. 築造時期는 가장 이른 시기인 6세기 중엽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亭岩里에서 調査된 터널형 石室墳은 割石으로 쌓았는데 단지 구조만 확인되었다. 맞조임식 石室墳은 터널형과 穹窿形石室墳이 일단 發展·變化된 형식으로 파악되는데, 陵山里割石墳이나 亭岩里地域의 맞조임 石室墳은 陵山里地域의 터널형 石室墳보다는 時差를 두어 6세기 中葉後가 될 것 같다. 괴임식 石室墳은 扶餘의 陵山里古墳群과 莘岩里, 豆谷里, 太陽里等에서 多數발견되었는데 石室의 규모와 사용된 材料에 따라서 身分上의 차이가 짐작된다. 陵山里古墳群의 東上塚, 中上塚, 西下塚등의 괴임식 石室墳은 泗沘遷都以後王이나 王族을 위해서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築造時期는 6세기후엽~7세기중엽으로 추정된다. 四壁垂直石室墳은 陵山里地域의 壁畵墳을 대표적이며 축조시기는 天井에 그려진 蓮瓣形式과 論山六谷里에서 출토된 土器의 형식을 볼 때, 7세기 중엽경으로 볼 수 있다. 中井里당산 火葬墓는 多器式인데 骨壶로 사용된 葬骨容器는 日常用器를 사용하고 주위에 土器를 副葬하였다. 扶餘新里, 軍守里, 雙北里等地의 火葬墓는 單器式인데 葬骨을 위한 專用骨壶를 만들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