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하구지역에 분포한 석실분들은 궁륭상천정석실분~괴임식석실분까지 다양하게 분포한다. 궁륭상천정 석실분인 입점리 1호분은 고분형태나 출토된 금동과모, 금동신발, 마구, 토기 등에서 그 축조시기를 5세기말~6세기초로 보았다. 중국 청자의 발견은 중국과의 교류를 짐작케한다. 입점리 8호와 웅포리 고분 출토 고배는 신룡리 토기요지의 생산품이 수급된 것으로 보이는데 인근 지역의 6세기말~7세기의 유적에서 고배가 보이지 않는 점과 석실의 기본형태는 같지만 축조석재와 연도에서 보면 입점리 1호분보다 늦은 시기인 6세기 중엽경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보통리 6호와7호는 중앙에 폭좁은 연도를 하고있고 6호분의 방형석실은 궁륭상천정석실분의 전통이 있지만 평면형태는 전축분의 영향으로 변화된 것으로 여겨지며 6세기초로 추정된다.
장상리 서지, 군둔부락 고분은 편재된 연도를 하지만 천정에서 맞조림과 괴임식 중간형태를 하며 축조석재에서 판석으로 이행하고 있어 그 시기는 6세기 중엽~말로 생각된다.
괴임식 석실분은 2~3지역에 주로 분포하며 쌍릉은 그 규모면에서 왕릉급에 속하고 고분형식이나 축조석재에서 능산리고분과 통한다. 이를 무왕의 익산경영과 관련시킬 때, 시기는 7세기 전반으로 볼 수 있다. 성남리 고분과 평화동 고분은 7세기 들어서 백제의 지방통치와 관련된 세력집단의 분묘로 보인다. 그러나 화평동 고분은 연도가 8자형으로 축약된 점, 석실과 연도높이의 비, 규모면에서 백제 최말기로 보인다.
이같이 금강하구지역에 분포한 고분들 가운데 1지역의 고분들은 입점리 1호분의 주인공이 5세기 말경 담로제의 장관인 만로왕과 같은 존재로 비정된다면 주변의 고분 피장자들은 담로제와 관련된 세력집단으로 이해될 수 있다. 2,3지역의 고분은 백젝 사비천도 후 지방제를 정비하면서 흡수된 세력집단으로, 특히 미륵산을 중심으로 2지역의 성남리고분을 비롯한 고분 주인공들은 무왕의 익산경영의 지지세력기반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필자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