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혈식 석실분의 사용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고구려나 백제, 신라, 가야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삼국 각국에서 이 횡혈식 석실분의 사용은 시간차를 두고 상호 영향 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즉, 백제의 횡혈식 석실분은 고구려의 영향 하에 신라나 가야는 백제 횡혈식 석실분의 영향 하에 전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횡혈식 석실분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이루어진다. 신라는 적석목곽분이란 전통적 묘제를 버리고 이 횡혈식 석실분에의 전환이 대체로 6세기 후반경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고구려나 백제는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횡혈식 석실분 조영이 진행되고 있다.
신라에서 조영된 횡혈식 석실분의 자료는 많지 않으나 그동안 집적된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 횡혈식 석실분은 대체로 백제의 궁륭식 천정구조를 지닌 횡혈식 석실분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 그런데 한반도 횡혈식 석실분 중 이 유형의 존재를 고려하면 동시기 신라 고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백제 고분이라 확인된다.
물론 고분문화의 전개에서 새로운 묘제의 도입시 기존의 전통적 요소도 새로운 묘제 속에 가미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도입된 묘제의 축조기술 등의 차이에서 일정한 변화를 예측할 수 있어 상호 대비시 구조형식에서의 차이는 이로써 이해가 가능하다 여겨진다.
신라 횡혈식 석실분의 구조형식이 백제고분과 상통성을 지니고 아울러 신라 횡혈식 석실분의 발생시기 등을 종합하면 이는 백제 횡혈식 석실분의 영향을 배제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필자 맺음말)